부촌으로 유명한 한남동 전경.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지난 2008년 세계 1위 손톱깎이 제조업체 ‘쓰리세븐(777)’은 창업주 사망과 동시에 회사가 넘어갔다. 이유는 상속세 때문. 고 김형규 회장은 타계 2년 전 임직원들과 가족에게 쓰리세븐 주식 360억 원어치를 증여한 상태였다. 대주주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임직원과 유가족들은 150억 원대의 상속세를 떠안게 됐다. 상속세를 마련하기 위해 이들은 증여 및 귀속된 주식 240만여 주 중 200만 주를 매각, 사실상 기업을 다른 회사에 넘겼다.
중소기업을 경영하는 이 아무개 대표(68)는 “CEO(최고경영자)들 사이에서 쓰리세븐 일화는 공공연하게 알려져 있다”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20년 넘도록 한 사업을 일궈 온 그는 60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노후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계획에는 피땀 어린 회사가 사후에도 순탄하게 운영되는 것은 물론, 배우자와 질 높은 노후생활 영위, 자녀를 위한 부동산 분배, 사회기부까지 포함돼 있다. 하지만 ‘세금 폭탄’이 두려워 실현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이 대표의 경우처럼 산업화 시대 대한민국의 경제를 이끌었던 기업 창업주들이 고령화되면서 상속·증여의 중심세대로 떠올랐다. 이들은 상속, 경영권 유지와 동시에 고령화시대의 긴 노년기를 대비해야 하는 숙제를 한꺼번에 안고 있다. 문제는 이들이 혼자 힘으론 계획대로 이루기 어렵다는 것. 이를 위해 은행, 증권사, 보험사 등 금융권은 상속·증여 관련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상속·증여 금융서비스의 이용자는 보통 현금성 자산 10억 원 이상, 총 자산규모 50억 원 이상의 CEO, 임원, 부동산 자산가 등이다. 한 보험사 파이낸셜플래너(FP)는 “상속·증여 금융서비스는 정치인, 공공기관 임원은 물론, 신분에 상관없이 돈 있는 사람이 이용한다”고 밝혔다.
최근 몇 년 새 서비스 이용자의 연령층이 낮아지고 있다는 것이 특징. 60대 이상이 서비스 이용자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이전과 달리 40대의 문의가 꽤 늘고 있다. 한국금융연수원의 김 아무개 교수는 “매체의 발달로 세무에 대한 궁금증이 높아진 데다 평균수명의 증가로 은퇴 후 삶이 무엇보다 중요해졌다”며 “젊을 때부터 인생 설계를 철저히 하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학계에선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사실 금융권의 상속·증여 서비스는 특별한 상품 형태가 아닌, 무료 일대일 상담을 기본으로 한다. 다시 말해 개인의 요구에 맞춰 금융권이 자산관리에 개입하는 식이다. 한 시중은행 지점장은 “이용자마다 니즈(Needs)가 천차만별이다. 고객에 따라 부동산 전문가, 세무사, 변호사, 노무사 등 전문 인력을 투입한다. 사후 형제 간 다툼을 우려하는 분들을 위해 가족 행사를 마련해주기도 한다”며 “한마디로 서비스 제공 범위를 한정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상속·증여에 의향이 있는 이들은 현행법 안에서 세금을 최대한 줄이는 방안을 가장 먼저 고민한다. 그도 그럴 것이 과세표준이 30억 원을 초과할 경우 50%의 최고 세율이 적용돼 재산의 절반을 세금으로 내야 한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상속·증여 금융서비스는 비상장기업 창업주, 부동산 부자들을 주요 고객층으로 삼고 있다”면서 “가업승계, 배우자와 자녀 간 재산분쟁 등 서비스 이용고객들이 저마다 고민을 안고 있어도 절세가 기저에 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금융서비스가 절세에 도움이 될까? 개인자산 50억 원대의 기업 CEO(53)는 “일반인이 모르는 법 지식을 제공받는다는 면에서는 도움이 된다”며 “향후 회사를 매각해 노후 자금을 장만하려는 나 같은 경우 금융서비스를 통해 일부 재산을 현금자산으로 바꾸거나 증여세 면제 금액만큼 미리 증여해놓는 등 구체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상속·증여에 관한 법적 분쟁이 늘어난 것도 관련 서비스에 대한 주목도를 높였다. 박건령 가족법 전문 변호사는 “이혼 및 재혼이 증가하면서 상속관계가 복잡해져 이에 따른 재산분할 소송이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상속·증여 분쟁의 중심에 ‘노모 부양’ 문제가 떠오르고 있다. 자녀의 부모부양 의무감이 낮아지는 상황에서 평균수명이 남성보다 긴 여성이 노후에 홀로 남게 되면, 노모는 생활권을 보호받기 어렵다는 것이다. 박건령 변호사는 “양어머니가 치매 증상이 있다는 점을 이용해 노모에 대한 금치산선고를 신청, 상속이 이뤄진 적이 있다. 노모의 친생자인 형제들과 재산이 분배되기 전에 재산 전부를 증여받으려는 이유에서 이런 일까지 벌였다. 노모의 마지막 보금자리인 집 한 채를 두고 재산 분할을 요구하는 자녀도 있었다”고 실례를 들며 “놀랍게도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전했다.
이와 관련, 올 초 상속법 개정안이 주요 쟁점으로 떠올랐다. 상속법 개정안의 핵심은 남편 또는 부인과 사별할 시 배우자가 상속재산의 50%를 우선 받고, 나머지를 자녀들과 현행 상속분대로 나눈다는 것이다. 하지만 상속법 개정안에 대해 찬반의견이 분분하면서 4월 이후 개정안 논의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분위기다.
김상용 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상속법 개정안 여론조사에서 찬성비율이 높았기 때문에 어느 시점이 되면 다시 추진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금융권에서도 상속법 개정안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앞서의 보험사 PB는 “상속법 개정안이 실제 통과된다면 후속 효과로 고객의 자문이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금융권도 이에 대비할 것”이라고 전했다.
이시연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