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만 두산그룹 회장. 사진은 합성. 일요신문 DB
지난 8일 두산그룹은 패스트푸드업체 ‘KFC’를 유럽계 사모펀드인 시티벤처캐피털(CVC)에 매각했다고 발표했다. 매각대금은 1000억 원. KFC는 두산에 남은 마지막 식음료사업부였다. 다시 말해 KFC 매각을 끝으로 두산은 식음료사업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1952년 동양맥주(현 OB맥주) 설립 후 ‘코카콜라’ 수입·판매, ‘종가집김치’, ‘버거킹’, KFC 등 식음료사업이 그룹의 주요 사업이었던 두산은 1996년 한국네슬레 지분 매각을 시작으로 1997년 음료사업부문 매각, 2001년 OB맥주 매각, 2001년 종가집김치 매각, 2009년 주류사업 부문 매각, 2012년 버거킹 매각 등을 거쳐 지난 8일 KFC 매각으로 18년 만에 식음료사업을 모두 정리했다.
두산 관계자는 “갑작스럽게 매각한 것도 아니고 몇 년 전부터 진행돼온 일”이라면서 “KFC 연매출이 1500억 원 정도여서 식음료사업을 완전히 정리했다는 것 말고는 그룹 차원에서 큰 의미는 없다”고 말했다. 두산의 그룹 전체 연매출은 24조~25조 원이다.
KFC 매각보다 재계에서 관심을 더 두는 것은 두산이 세계 최대 철강회사인 아르셀로미탈로부터 ‘서킷 포일’을 인수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다. 2001년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 인수 이후 10년여 동안 M&A 시장을 주름잡다시피 한 두산이 2012년 이후 멈췄던 ‘식욕’이 되살아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아울러 두산의 재무구조가 M&A에 재시동을 걸 만큼 괜찮아졌느냐는 의문도 일고 있다.
왕성한 식욕을 과시하던 두산이 지난 2년간 M&A 시장에 숟가락을 얹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유동성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2007년 ‘밥캣’을 인수하는 데 무리한 데다 두산건설이 유동성 위기를 겪으며 그룹이 흔들렸다.
두산은 51억 달러에 밥캣을 인수하면서 47억 달러나 빌렸다. 이 가운데 8억 달러는 ‘연복리 9%’라는 풋백옵션을 내걸고 재무적 투자자들로부터 끌어왔다. 인수금액이 과하다는 지적도 받았지만 그보다는 차입금이 너무 많았으며 그에 대한 금융비용을 감당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건설경기 침체와 미분양 등의 여파로 두산건설마저 휘청거리면서 두산은 M&A 시장에서 자취를 감췄다. 실제로 박용만 회장은 2012년 그룹 회장에 취임한 직후 현 사업에 주력하고 당분간 M&A는 자제할 뜻을 내비치기도 했다.
이 같은 근거로 재계와 증권가에서는 두산건설의 위기 탈출과 밥캣의 자금 자체 조달을 들고 있다. 지난해 12월 31일 기준, 두산건설의 재무제표를 살펴보면 두산건설이 큰 위기는 넘긴 것을 알 수 있다. 두산건설은 2012년 4491억 원의 적자에서 지난해에는 573억 원의 영업이익을 거뒀다. 부채비율도 2012년 568%에서 지난해에는 145%로 확 낮아졌다.
또 지난 14일 두산인프라코어는 밥캣을 인수하는 데 빌린 차입금 중 갚지 못했던 17억 달러를 밥캣 자체 신용만으로 차환(이미 발행한 채권을 새로 발행한 채권으로 상환하는 것)했다고 밝혔다. 그동안에는 두산인프라코어의 신용보증이 있어야만 채권을 발행할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두산인프라코어의 보증 없이 밥캣 자체 신용으로 채권을 발행해 자금을 조달했다는 얘기다. 밥캣이 살아나고 있다는 의미라는 것. 재무구조가 서서히 안정화되면서 두산이 그동안 주춤했던 M&A에 다시 나서고 있다는 해석이다.
하지만 예전 같은 활발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전문가가 적지 않다. 재계 관계자는 “밥캣으로 고생한 경험 때문에 예전처럼 폭식하지는 못할 것”이라며 “현재 두산그룹 사업구조에서 새로이 추가할 사업도 마땅치 않다”고 말했다. 재계 다른 관계자는 “빅딜도 아니고 1000억 원도 안 되는 딜을 두고 의욕을 보인다고 평가하기는 무리”라면서 “서킷 포일이 뭐 하는 회사인지, 서킷 포일이라는 회사 이름이 맞기는 한 건지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평가절하했다.
서킷 포일은 룩셈부르크에 있는 회사로, 전자제품과 스마트폰의 핵심부품 중 하나인 인쇄회로기판(PCB)에 쓰이는 동박적층 관련 원천기술을 보유한 업체로 알려져 있다. 인수 주체는 (주)두산이며 인수 금액은 약 700억 원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자사업부를 두고 있는 (주)두산은 동박적층판을 생산, 삼성전자 등에 납품하고 있다. 스마트폰 열풍이 불면서 (주)두산의 전자사업부도 지난해 7000억 원가량의 매출을 올렸다.
그렇지만 두산그룹 측은 최근 움직임을 두고 확대해석하는 것을 경계했다. 두산 관계자는 “700억 원 정도 투자하는 것을 갖고 M&A에 재시동을 걸었다고 표현하는 것은 너무 앞서가는 일”이라면서 “1995년부터 시작한 그룹의 사업 구조조정의 귀착점이 거의 다 왔으므로 새삼 새로운 M&A를 추진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현재 사업에 필요한 소규모 딜이나 원천기술을 확보하기 위한 딜은 있을지 몰라도 조 단위나 수천억 원이 들어가는 빅딜은 없을 것”이라면서 “비록 재무구조가 안정화 단계에 들어서고 있지만 빅딜을 추진할 만큼 자금 사정이 여유롭지도 않다”고 덧붙였다.
두산그룹의 변신을 주도하면서 ‘M&A 귀재’로 불렸던 박용만 회장이 향후 어떤 모습을 보일지 궁금증을 일으키고 있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