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의원은 질의를 시작하자마자 문건 3개를 제시했다. 국정원에서 입수한 도청자료라는 게 정 의원의 설명이었다.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이 한화그룹 김영배 사장, 청와대 김현섭 민정비서관, 국회 공적자금 국정조사 특위 위원장인 민주당 정세균 의원 등 3명과 통화한 내용을 국정원이 도청했고 이를 자신이 입수했다는 것이다.
정 의원은 “한화그룹은 대한생명을 인수할 수 있는 자격이 없음에도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돼 본계약까지 체결하게 된 데는 청와대와 여권핵심부를 동원한 치밀한 로비 때문”이라며 도청자료를 하나하나 설명했다.
정 의원이 폭로한 3개의 도청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국정원에서 제보받은 도청 녹취록 원본이 아니라 녹취록을 바탕으로 정 의원이 보도자료 형태로 재구성한 것이다.
첫째 지난 5월 한화그룹 김영배 사장이 독일에 체류중인 김승연 회장에 전화로 대한생명 인수작업에 대해 보고한 것. 이 통화에서 김 사장은 “강금식 공적자금관리위원장과 서울대 경제학과 동기로 친한 사이인 그룹의 노아무개 부회장을 이용해 대한생명의 인수작업을 전개하겠다. 분위기 조성을 위해 민주당 이재정 의원 등을 동원해 로비를 하고 민간위원들과 별도 접촉하는 등 철저히 관리하겠다. 그동안 대한생명 인수를 방해한 어윤대 매각심사소위원장의 매장 방안을 마련중이다”고 보고했다.
이에 김 회장은 “민주당 한화갑 대표와 노무현 대통령 후보를 접촉, 협조요청하라. 노 후보가 인수에 협조해주면 미국 상•하원 의원들과의 면담도 주선해주고 미국 정계의 노 후보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키는 데 일조하겠다”고 지시했다.
▲ 지난 9월 25일 금감위 국정감사장. 정형근 의원 좌석에 ''한화 김승연 회장의 대생 인수 로비" 문건이 놓여 있다. | ||
세 번째 도청은 김 회장이 청와대 김 비서관에게 전화한 같은 날 민주당 정세균 의원에 전화한 것이다. 김 회장은 정 의원에게 “윤 차관에게 압력을 넣어달라”고 부탁했다.
정 의원이 국정원에서 입수했다고 주장하는 도청자료를 바탕으로 한 이 발언은 통화자, 날짜, 등장인물, 대화 내용 등이 워낙 구체적인 데다 민주당 노무현 후보와 한화갑 대표, 청와대 박지원 비서실장 등이 등장인물로 나와 그야말로 메가톤급 폭로였다.
청와대와 민주당, 그리고 한화그룹은 발칵 뒤집혔다. 무엇보다도 도청자료가 흘러나왔다는 진원지인 국정원은 벌집을 쑤신 듯했다. 이들은 즉각 정 의원의 주장을 조작이라고 몰아붙였다. 관련자들도 모두 통화사실을 부인했다. 민주당은 정 의원이 사설도청팀을 운영하고 있다고 맞받아쳤다.
정 의원은 관련자들이 부인하자 곧바로 국감장을 빠져나와 한나라당 기자실로 와서 기자들과 만났다. 정 의원은 자신이 사설도청팀을 운영했다는 민주당의 주장에 대해 “국정원이 도청을 했고, 녹취록을 만든 것을 상부에 보고하는 라인에서 한 고위간부가 울분과 정의감에서 전해준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 의원은 “지난해 8천억원의 흑자를 낸 대한생명을 한화그룹이 겨우 2천4백70억원에 인수하는 과정에서 여러 의혹이 제기됐다. 지금 국정원과 한화그룹은 홀딱 뒤집어졌다”고 말했다.
실제로 한화그룹의 대한생명 인수는 공적자금관리위원회의 민간위원 3명이 끝까지 반대한 가운데 표결처리돼 상당한 의혹을 남기고 있다. 대한생명이 흑자기업인데 헐값으로, 그것도 부채비율 등 자격시비가 있는 한화그룹에 매각된 점 등을 둘러싸고 정치권의 개입설이 끊이지 않았고, 재계에서는 제2의 국제그룹 사태라는 말이 떠도는 상황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정 의원은 사석에서 기자들 몇 명과 만나 “나는 국정원의 도청자료를 더 가지고 있다. 국정원이 여권인사들을 샅샅이 도청하고 있다. 아마 내가 공개하게 되면 여권인사들과 국정원이 기절초풍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 의원은 26일 금감위 국정감사에서 한화그룹 비서실이 올 1월 박근혜 의원측에 전화를 건 통화기록 한 건을 추가로 제시했다. 정 의원의 한 측근은 “전•현직 청와대 수석급 이상에 대한 도청기록이 확보돼 있다”고 주장했다.
정 의원은 오는 4일 금감위 국정감사에서 이 가운데 몇 가지 도청자료를 공개하겠다고 밝혀 정치권의 눈과 귀는 온통 정 의원에 쏠려 있다. 이 때문에 국정원은 정 의원에 국정원 내부자료를 제보해주는 내부고발자를 찾느라 혈안이 돼 있다.
국정원은 이미 지난 8월 정 의원이 한화갑 대표의 방북설, 이른바 ‘도라산 프로젝트’를 폭로했을 때 한 차례 혹독한 내부감찰을 벌였으나 아직까지 정 의원에 줄을 대는 라인을 적발해내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정 의원은 이와 관련 “국정원이 아무리 찾으려해도 찾지 못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정치권에서는 임기말이 가까워지면서 사실상 국정원을 한나라당이 장악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한나라당의 한 핵심당직자는 “대선이 다가오면서 내부고발 라인이 점점 확대돼 제보 경쟁을 벌이는 사태까지 벌어지고 있다”고 귀띔했다.
▲ 문건을 들고 의혹을 제기하는 정의원.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정 의원은 “정상회담이 하루 늦어진 것은 약속한 돈을 다 주지 못했기 때문”이라면서 “대북 4억달러 비밀지원에 요시다 다케시 사장이 상당한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요시다 사장에 대한 정보도 정 의원이 국정원에서 입수했다는 도청자료에서 나왔을 것이라는 게 정치권의 관측이다. 정 의원은 “요시다 사장은 남한과 북한을 오가며 청와대 박지원 비서실장, 김윤규 현대아산 사장과 수시로 전화통화하는 사람”이라고 말해 이 같은 관측을 뒷받침했다. 정 의원은 이에 대해 “조만간 요시다 사장에 대한 자료도 공개하겠다”고 말했다.
현재로서는 정 의원이 제시한 도청자료의 진위를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청와대와 민주당, 그리고 국정원은 정 의원의 자작극 내지는 도청자료 조작으로 몰아붙이고 있다. 그러나 도청자료의 내용이 워낙 구체적인 데다 정 의원의 정보력을 감안해볼 때 이 문제가 앞으로 대선정국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정치권은 보고 있다.
김일송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