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오석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원안은 지난해 12월 열린 ‘경제살리기를 위한 전경련 회장단 간담회’.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현오석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5월 26일 서울 세종로 ‘드림엔터’에서 열린 제2차 창조경제 민관협의회에서 “기업들이 투자의 집행 실적을 꼼꼼히 점검해 가급적 앞당길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업들의 투자를 독려했다. 이 자리에는 대한상공회의소, 전국경제인연합회, 한무역협회, 중소기업중앙회, 한국경영자총협회, 은행연합회, 중견기업연합회, 벤처기업협회 등 주요 경제단체 대표들이 모두 참석했다.
한마디로 정부가 경제계를 향해 ‘곳간’을 열라고 으름장을 놓은 셈이다. 정부의 기업투자 독려에는 그만큼 다급한 사정이 있다. 1분기 민간 소비 부진과 세월호 참사에 따른 심리적 여파가 경기 회복에 찬물을 끼얹으면서 내수 경기 부양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3.7%로 당초보다 0.2%포인트 하향 조정했다. 1분기 민간소비 부진과 세월호 참사 여파에 따른 소비심리 악화가 그 이유였다. 주요 증권사들도 올해 우리 경제가 상고하저 흐름을 보이며 연간 성장률이 3%대 중후반에 그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에 따라 일각에서는 ‘더블딥(경기 반짝 회복 후 다시 침체)’에 빠지지 않으려면, 선제적인 추가경정예산안을 편성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까지 나오고 있다. 정부 당국은 추경 편성까지 거론할 정도는 아니라는 입장이지만, 그만큼 현재 경제상황에 대한 우려가 깊다는 반증임에는 틀림없다.
현 부총리가 “경제 주체의 심리 회복을 위한 모멘텀이 절실하다”면서 “정부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민간의 역할과 협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맥락이 여기에 있다. 현 부총리는 28일 경제관계장관회의에선 “경제주체들의 심리가 위축되면 소비와 투자가 부진해지고 결국 경제활동 전반이 둔화돼 전체 국민소득이 감소할 수도 있다”고 걱정까지 늘어놓았다.
급기야 정부는 1000억 원 규모의 온누리 상품권을 개인들에게 10% 할인된 가격에 팔기로 했고, 세월호 참사로 중단됐던 각급학교의 수학여행도 2학기부터 재개될 수 있도록 하는 절차에 착수했다. 공무원 복지 포인트도 8월 말까지 쓰도록 권고했다. 내수를 위해 마른 수건을 짜내는 듯한 모양새다.
하지만 기업들의 반응은 영 시원찮다. 전경련 관계자는 “지난해 30대 그룹에서 불어 닥친 구조조정의 여파가 여태껏 이어지고 있는데 투자 분위기가 살아나겠느냐”고 반문하며 “정부도 개각을 앞두고 있어서 경제팀의 정책 주도권에 대해 회의적”이라고 전했다. 현 부총리를 포함한 경제팀 전체가 개각 대상으로 거론되고 있는 상황에서, 기업들이 말을 듣겠느냐는 얘기다.
또 다른 대기업 고위임원은 “SK그룹마저도 몇 년 전부터 미국에서 추진해온 태양광 전지 사업을 정리하기로 했지 않느냐”면서 “수익성이 보장되지 않는데 돈을 쏟아 부을 기업이 어디 있느냐. 그건 그냥 사회에 기부하라는 얘기”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대기업들이 신사업 진출을 주저하는 데에는 기존 주력 사업의 수익성이 떨어진 탓이 크다는 게 업계의 지배적인 분석이다. 특히 정유, 석유화학, 철강, 중공업 등 장치산업의 부진이 두드러진다. 지난 2011년 4% 안팎이었던 SK이노베이션, GS칼텍스, 대한항공 등의 영업이익률은 올해 1분기 1% 안팎으로 추락했다. 2011년 8.51%의 영업이익률을 기록했던 현대중공업은 올해 적자로 돌아섰다.
그렇다고 자금 여력이 아주 나쁜 상황은 아니다. <CEO스코어>가 최근 집계한 30대 그룹의 현금과 단기금융상품을 합한 현금성 자산은 지난해 말 157조 7010억 원으로, 2012년 말에 비해 18.3% 증가했다. 결국 기업들은 여유자금으로 빌린 돈을 갚고 관망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차입금을 갚고 사업 매각을 검토하는 등 재무구조 개선에만 힘쓰고 있는 것이다.
LG경제연구원이 유가증권시장에 상장된 614개사의 재무제표를 분석한 결과, 이들 기업들의 차입금은 지난 2010년 260조 8657억 원에서 2012년 316조 6417억 원까지 늘었다가 지난해 316조 3082억 원으로 3335억 원 감소했다.
LG경제연구원은 “기업들이 투자지출을 늘리면 차입금이 매년 증가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지난해에는 이례적으로 감소세로 돌아섰다”며 “중소·중견기업보다 대기업의 차입금 축소가 더욱 두드러졌다”고 분석했다. 웅진, 동양, STX 등이 잇달아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기보다는 재무구조 안정을 우선하겠다는 인식이 기업인들 사이에 팽배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경련 관계자는 “대기업들이 몸을 움츠리며 신사업 투자를 꺼리는 현상이 확산되고 있는 현상의 피해는 결국 국민경제가 질 수밖에 없다”면서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라 실제로 투자규제에 대한 결단을 내리거나, 경제정책 방향에 대한 대전환이 없으면 기업들의 곳간 지키기는 쉽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웅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