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정희 전 대통령. | ||
박 전 대통령은 이 모임에서 고복수의 ‘짝사랑’을 구성진 목소리로 불러 잔잔한 감동을 던져주고 있다. 이밖에 장남 지만군이 ‘새마을 노래’ 가사를 잘 몰라 다시 부르는 장면, 프랑스 유학에서 돌아온 뒤 ‘영부인 스타일’로 머리를 올려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던 근혜양의 23세 때 모습도 볼 수 있다.
한편에서는 친일파에 독재자로, 또 다른 한편에서는 근대화 기틀을 다진 ‘영웅’으로 추앙 받고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 지금도 이에 대한 논란은 계속되고 있지만 이 동영상은 장모님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한 사위의 인간적인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75년 1월 있었던 박 전 대통령의 슬픈 가족모임을 ‘리플레이’ 해본다.
때: 1975년 1월 어느 날
장소: 청와대 본관 1층 식당
등장인물: 박정희 대통령, 박근혜 근영(훗날 서영으로 개명) 지만, 육인수(육영수 여사의 오빠) 의원 내외와 자녀들, 육예수씨(육 여사 여동생) 내외와 자녀들, 육인순씨(육 여사 언니) 자녀들 등등.
많은 국민들의 가슴을 ‘짠’ 하게 만들었던 30여 년 전의 34분짜리 가족모임 동영상의 ‘자막’은 이렇게 올라간다. 제목은 ‘가족과 함께’였고 부제는 ‘이경령 여사 80회 생신날’이었다.
영상의 첫 장면은 파란색 양복을 입은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 식당 문 앞에서 하객들을 맞이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는 여느 사위들이 그러하듯 처가쪽 사람들과 반갑지만 어색한 인사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그 어색한 미소 뒤에 흐르는 애틋한 정은 숨길 수 없었던지 어느새 훌쩍 큰 처조카들을 보며 환하게 웃어 보이기도 했다.
박 대통령 옆에는 육영수 여사 대신 근혜양이 빨간색 원피스를 입고 외가 친척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근혜양은 어머니 피격 소식을 듣고 프랑스 유학을 중단하고 곧바로 청와대로 달려왔었다. 장례식 때도 놀라울 정도로 침착한 모습을 보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그녀였다. 어머니가 피격되고 불과 5개월밖에 흐르지 않았지만 근혜양의 머리 스타일은 그때 이미 위로 단정하게 올려져 있었다. ‘영부인 스타일’이었다. 아버지 옆에서 같이 인사를 하며 밝게 웃는 그녀의 모습이 어머니만큼 세련되고 정이 넘쳐 보였다.
이어서 이경령 여사도 등장했다. 쪽진 머리에 하얀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이 여사의 자태에서 둘째딸 육영수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이 여사는 자신을 위해 생일파티를 하는 ‘상황’에 대해 너무나 어색해한 나머지 연신 손으로 입을 가리며 수줍어했다. 당시 이 여사는 딸의 갑작스런 죽음에 대한 충격으로 실어증에 걸려 말을 못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박 대통령은 실의에 빠진 장모님을 위해, 그렇게 생일 잔치를 마련한 것이었다. 생일 케이크 절단이 있은 뒤 박 대통령은 이 여사를 식탁으로 모시고 가서 직접 의자를 뒤로 빼 편하게 앉을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할머니 오늘 생신인데 만수무강을 빕니다.”
박 대통령은 축배를 제의했다. 그리고 모두 즐겁게 식사를 시작했다. 이때부터 가족 노래자랑이 있기 전까지 ‘정치적’인 이야기가 박 대통령과 육영수의 여사의 오빠인 육인수 의원(당시 국회 문광위원장) 사이에서 오간다. 유신헌법 국민투표 문제와 인도 경제 발전의 배경, 한일 유전 공동개발구역에 관한 이야기 등이 화제로 올랐다.
▲ ‘박정희 동영상’ 장면들. 하얀 한복을 곱게 입은 이경령씨 주위로 박정희 전 대통령과 박근혜 대표가 보인다(위). 아래는 노래하는 박근혜대표. | ||
사회는 육 여사의 언니 육인순씨의 아들 홍국표씨가 맡았다. 그는 먼저 박 대통령의 18번인 ‘꿈꾸는 백마강’을 불렀다. 박 대통령은 담배를 지긋이 피워 물면서 상념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는 술자리에 앉으면 먼저 앞에 놓인 젓가락 술잔 재떨이 같은 것을 반듯하고 가지런하게 다시 놓곤 했다고 한다. 주변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게 버릇처럼 돼 있었다는 것. 이날도 그는 자기 앞의 술잔과 젓가락을 계속 반듯하게 놓으려고 손놀림을 바쁘게 움직이기도 했다.
여러 사람들이 노래를 불렀다. 차례가 박 대통령 장남 지만에게도 돌아왔다. 지만은 중앙고에 재학중이던 까까머리 학생이었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마을이 밝았네(‘새아침이 밝았네’를 잘못 부름)….”
지만은 가사도 틀렸고 음정도 너무 높았던 것을 알고 노래를 중단해버렸다.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지만은 노래가 틀리자 아버지의 기대에 어긋난 데에 대해 주눅이 든 듯 표정이 잠시 우울해지기도 했다. 곧이어 박 대통령이 “지만이 틀려도 괜찮아. 해. 얼떠서 그래”라며 격려를 해주었다. ‘대통령의 아들’ 지만은 이번만은 틀리지 않겠다는 듯 두 눈을 질끈 감고 힘차게 노래를 불렀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마을이 밝았네(그는 이 대목에서 또 틀리고 말았다). 너도 나도 일어나….”
곧 이어 참석한 사람들이 전부 ‘새마을 노래’(이 곡은 박 대통령이 작사 작곡한 것이다)를 합창하기 시작했다. 노래가 끝나자 박수가 이어졌다. 지만은 ‘분투’했지만 대통령의 아들에게 주어지는 버거운 중압감이 그의 ‘어두운’ 앞날을 예고하는 듯했다.
이번엔 근영씨 차례가 되었다. 그녀는 당시 서울대 작곡과에 재학중이었다. 귀여운 단발머리에 수줍은 모습을 지었던 그녀는 전형적인 여대생이었다.
“비둘기처럼 다정한 사람들이라면/ 장미꽃 넝쿨 우거진 그런 집을 지어요….”
근영씨는 부끄러운 듯 살짝 고개를 숙이고 ‘비둘기집’을 불렀다. 그녀는 훗날 박 대통령의 장례식에서 텔레비전에 유족의 모습이 비칠 때마다 유독 고개를 숙이곤 해서 얼굴이 한 번도 카메라에 잡히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는 이에 대해 “학교 다닐 때도 얼굴이 알려지는 것에 대해 신경을 많이 썼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근영씨는 ‘비둘기집’을 불렀지만 그녀 인생은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 재벌가에 시집을 갔지만 이혼의 아픔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육영재단 이사장직 해임을 둘러싸고 성동구청 교육청과 분쟁을 벌이다 최근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에 따라 이사장직에 복귀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했다.
분위기는 점점 무르익어 박정희 대통령 차례가 왔다. 그는 “할머니 옛날 노래…” 하면서 노래를 시작했다. 고복수가 부른 ‘짝사랑’이었다(손목인 작곡, 박영호 작사, 1936년 발표).
“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 지나친 그 세월이(음정이 높이 올라가지 않아 멋쩍게 옆에 있는 육인수 의원을 보며 웃음) 나를 울린다(‘울립니다’가 원 가사)/ 여울에 아롱 젖은 이즈러진 조각달/ 강물도(이번에도 음이 올라가지 않아 겸연쩍게 웃으며 슬쩍 넘어가려 함. 자신도 무안한 듯 전보다 더 크게 웃음) 출렁출렁 목이 메입니다.”
이날 박 대통령이 실수를 하면서 소탈하게 웃는 모습은 분명 그 동안 그가 짊어지고 있었던 근엄하고 음습한 이미지와는 분명 다른 것이었다.
어떤 네티즌은 이에 대해 “국론이 사분오열 되고 경제도 침체에 빠진 요즘, 어려움을 뚫고 국가의 기틀을 다진 진정한 지도자로서의 박정희가 그리워진다”고 평가하고 있다. 또 다른 네티즌은 “순박한 웃음으로 자신의 실수를 넘기려는 것이 인간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동정심 유발일 뿐”이라는 견해와 “독재에 항거한 민주인사들이 없었더라면 그는 아직 권좌에 있었을 것”이라거나 “민중들의 피와 땀으로 경제성장을 이룬 것이지 박 대통령과는 상관없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이 동영상은 박근혜양이 ‘새마을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끝이 난다. 그는 낭랑한 목소리로 힘차게 ‘아버지의 노래’를 불렀다. ‘합창’이 끝나자 친척들에게 “여러분 협조에 감사합니다”라며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박 대통령은 이날 모임에서 ‘짝사랑’을 1절만 불렀다. 하지만 그의 노래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부인을 잃은 비통한 심정으로 다음 2절을 더 부르고 싶지 않았을까.
“아- 뜸북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 잃어진 그 사랑이 나를 울립니다/ 들녘에 떨고 있는 임자 없는 들국화/ 바람도 살랑살랑 맴을 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