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21부(황찬현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이날 공판에서 변호인의 심문을 받던 유씨가 “검찰의 공소 내용 중 이문동 살인 사건은 허위로 진술한 것이며 실제 범인은 다른 곳에서 웃고 있을 것”이라고 진술했기 때문.
특히 유씨는 “경찰이 이문동 사건 내용을 미리 보여주며 이를 자백하도록 회유했다”며 실제 자신에게 기록을 보여줬다는 경찰관의 실명까지 거론해 재판장을 술렁이게 했다.
이미 유씨는 지난 7월 경찰에 검거된 후 이문동 살인 사건도 자신이 저지른 범행이라고 시인한 바 있다. 특히 검거 직후 ‘이문동 사건’ 현장 검증에서는 당시 범행 상황을 구체적이고도 태연하게 재현해 냈다. 더욱이 지난 9월6일 1차 공판에서 이문동 사건에 관한 검찰 공소 기록에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상황에서 불쑥 튀어나온 발언이라 더욱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다.
이날 2차 공판에서 유씨는 “경찰 모 간부가 아들을 대학까지 보장할 테니 자백하라고 한 사실이 있나”라고 묻는 차형근 변호사의 질문에 “그렇다”고 답했다. 그리고는 “나를 잡은 경찰들이 사건 내용을 보여주면서 (이문동 사건을 자백하면) 아들을 대학까지 보살펴 주고 구치소에 영치금도 넣어주겠다고 해 거짓 진술한 것”이라고 대답했다.
유씨는 자신을 수사한 경찰과 검찰을 비웃기라도 하듯, “이문동 사건의 진범은 어디선가 웃고 있을 것이고 경찰의 수사 기록을 그대로 베낀 검찰이나 초기 수사를 제대로 못한 경찰은 욕을 들어야 한다”고 공격의 수위를 높여 재판을 지켜보던 경찰 관계자들을 아연실색케 했다.
과연 유씨는 이문동 사건과는 관계가 없는 것일까.
일반 여론은 여전히 유씨가 이문동 범행을 저질렀을 것으로 보는 시각이다. 유씨가 검거된 후 같은 혐의에 대해서도 수시로 엇갈린 내용을 진술했던 전례가 있는 만큼 이번 발언도 진실성을 엿보기 힘들다는 지적이다. 경찰이 유씨가 검거된 직후 ‘유씨 스스로 직접 자술서를 작성하면서 이문동 사건 피해자의 인상착의와 현장 상황을 구체적으로 진술했다’고 밝힌 점에 무게 중심을 둔 판단이기도 하다.
유씨를 검거한 서울지방경찰청 기동수사대는 물론, 유씨 검거 전까지 이문동 사건을 수사했던 관할 청량리경찰서측에서도 유씨의 ‘허위 자백’ 주장에 대해 “어이없다”는 입장.
서울경찰청 관계자는 “유씨는 사건 당일 진눈깨비가 왔던 사실은 물론, 피해자의 가방이 R가방 제품이라는 점까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청량리경찰서 관계자도 “유씨의 진술서가 무려 A4용지로 20여 페이지가 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사건을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이상 이처럼 많은 내용을 진술하기가 상식적으로 어렵지 않겠느냐”고 반문하면서 “유씨가 이문동 사건을 자백하는 과정에서 형사들이 수시로 범행 사실을 재확인하자 ‘범행을 저지른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있냐’고 되레 형사들을 나무랐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범행 현장의 정황도 유씨의 범행 가능성을 어느 정도 뒷받침하고 있다. 이문동 사건의 경우 주택 내부가 아닌 길거리에서 사람을 살해하기는 했으나, 주변에 교회가 있고 피해자의 지갑에 돈이 그대로 남아 있던 점 등에서 유씨의 여타 사건과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는 것.
또한 유씨가 앞서 1차 공판에서 당시의 범행 상황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검찰 신문에 아무런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이문동 사건을 유씨의 범행으로 보는 또 하나의 이유다.
검찰은 1차 공판에서 유씨가 택시를 타고 사건 현장을 지나치다 D찻집 등의 간판을 보고 택시에서 내린 과정에서부터 주택 잠입에 실패한 뒤 피해자 전아무개씨에게 접근, 살해할 때까지의 공소 기록을 촘촘히 끊어서 유씨에게 확인시켰고, 결국 유씨로부터 “공소 사실을 모두 인정한다”는 답변을 끌어낸 바 있다.
특히 검찰은 유씨로부터 피해자 전아무개씨를 살해한 당일 피해자가 윤락녀가 아니어서 허탈한 마음에 윤락녀와 관계를 맺으려고 은행에서 10만원을 인출했으며, 범행 후 모친에게 전화해 바닷가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게다가 10만원 은행 인출기록과 전화 통화내역 등 유씨를 범인으로 입증할 만한 물증까지 확보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유씨 심리분석에 참여했던 심리학자들 역시 이구동성으로 유씨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여론을 지배하고 싶어하는’ 연쇄살인범 특유의 욕구가 발동한 것으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이처럼 “이문동 사건은 내가 저지르지 않았다”는 유씨의 법정 진술을 믿을 수 없다는 여론이 대세로 굳어진 가운데, 검찰과 경찰 주변에서는 유씨가 하필 왜 이문동 사건을 지목하며 혐의를 부인했는지 그 심경 변화를 일으킨 배경에도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현재까지는 유씨가 자신과 연관된 살인 사건 중 수사상 시행착오 과정을 가장 많이 치른 이문동 사건을 빌미로 삼아 이전부터 쌓아두었던 수사 기관에 대한 불만을 터트리는 게 아니냐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유씨가 검거 직후 수사 과정에서도 수사진에게도 호통을 치는 대담한 모습을 보인 ‘전례’가 적지 않았다는 점에서 검·경 주변에서는 이 같은 해석을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일부에서는 ‘검·경이나 언론이 자신의 말 한마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을 보면서 차츰 자기만족의 수위를 높여가는 것이 아니냐’는 분석도 들리고 있다.
한편 극소수지만 유씨가 진실을 말하고 있을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다는 ‘동정론’도 일부 고개를 들고 있다. 이왕 자신의 혐의가 다 드러난 시점에서 굳이 한 사건만을 자신이 하지 않았다고 번복할 이유가 현실적으로는 없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이문동 사건의 경우, 서울경찰청은 물론, 관할인 청량리경찰서 내에서도 “(그간) 헛다리 짚은 사건”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라는 점에서 실제 ‘짜 맞추기’ 수사가 진행됐을 가능성을 간과할 수 없다는 지적도 들려오고 있다.
과연 이문동 사건의 ‘진실’은 무엇일까. 피의자의 진술을 뛰어넘는 수사기관의 과학수사가 아쉬운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