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희 씨의 젊은 시절 모습. 갓스물의 나이에 정주영 회장을 만났다.
김 씨의 아버지는 서울대 의대를 다니다 중퇴한 건달이었다. 그는 영어와 일어를 잘해 미군 간부의 눈에 띄어 양아들이 된다. 양아버지의 그늘 아래 김 씨 아버지는 미군 공사를 다 따냈다. 김 씨 아버지는 이때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한다. 건설회사 사장으로 잘나가던 김 씨 아버지는 평소 외도가 있어 왔으나 돈이 생기자 외도가 더욱 심해졌다.
이를 참지 못한 김 씨 모친 임 씨는 이혼을 결심한다. 하지만 남편은 절대로 이혼에 합의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혼 결심을 한 임 씨를 찾아가 빌기도 하며 마음을 돌리려고 노력했다. 임 씨는 이혼해주지 않으면 위자료 소송을 걸 것이며, 그러면 사업도 흔들릴 것이라고 남편을 협박한다. 남편은 어쩔 수 없이 이혼에 합의하면서도, “그렇다면 돈은 한푼도 가져가지 말라”고 했다. ‘여자 혼자 밖에 나가서 돈이 없으면 곧 돌아올 것’이라는 심산이었다.
자존심이 무척 센 임 씨는 이혼할 때 약속대로 남편의 돈을 하나도 갖고 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남편의 돈이 “더럽다”고 표현했다. 그는 생활비를 위해 갖고 있던 패물을 판다. 패물 판 돈으로 콩나물 장사를 생각하다, 콩나물 팔아서는 애들을 대학에 못 보낼 것이라고 판단한다. 우연히 간 명동 다방에서 거액이 오가는 것을 보고 뭐냐고 묻자 사채라는 대답을 들은 임 씨는 패물 판 돈으로 과감하게 명동 사채시장에 진입한다. 임 씨는 “늘 운이 좋았다”고 했다. 이때도 임 씨가 빌려준 돈은 재깍재깍 돌아왔다고 한다. 하지만 임 씨는 “이 짓을 더 하면 천벌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해 금방 그만두었다”고 말했다.
임 씨는 부동산업으로 방향을 돌린다. 당시 빚에 쪼들려 내놓은 집들이 꽤 있었다. 임 씨는 이 집들을 사서 깨끗이 수리해 다시 파는 사업을 했다. 이때 임 씨는 한 명의 투자가를 만나게 된다. 그 투자가는 임 씨에게 “집은 몇 채라도 좋으니 깨끗이 수리해두면 내가 사겠다. 큰 평수 위주로 구매하라”고 제안했다. 임 씨는 이때 본격적으로 거액을 만지게 된다. 임 씨의 사업이 이렇게 번창한 반면 임 씨 남편은 급격하게 몰락했다. 독점적으로 미군 공사를 수주하는 것을 시기한 한 경쟁자의 총에 맞아 반신불수가 된 것이다.
1970년대 고속도로 공사현장을 돌아보는 정주영 회장. 사진출처=아산정주영닷컴
임 씨는 큰돈을 만진 후에는 집을 짓고 아이들을 챙기는 데 주력한다. 패물과 같이 팔았던 김 씨의 그랜드 피아노를 다시 사왔을 때는 감격에 겨웠다고 회상했다. 당시 집안이 망해 제주도나 시골 땅문서를 임 씨에게 들고 오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아주 헐값이라도 받으려고 하기 때문에 이 땅 문서는 임 씨의 용돈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는 “이번 달 용돈을 좀 줄이지, 하는 마음으로 가보지도 않고 샀던 땅들이 지금 가격이 많이 올라 거액을 모으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살던 무렵 딸 김경희 씨는 정 회장을 만난다. 이때부터 정 회장은 임 씨가 건물만 사면 나무랐다고 한다. 자신이 단명한다는 점괘를 믿은 임 씨는 건물이나 토지를 살 때 명의를 김경희 씨로 해두었다. 이것을 안 정 회장은 임 씨에게 “왜 사셨어요! 제가 어련히 챙기려고. 산 건물은 다시 파세요. 그리고 그 돈으로 여행이나 다니세요”라고 나무랐다고 한다. 임 씨가 “이제 막 사서 다시 팔기 힘들다”고 하면 정 회장은 “그럼 누구 주세요”라며 역정을 냈다. 그 이유를 임 씨는 이렇게 추측했다.
“자기는 집 한 채 안 사주고 내가 집을 사서 명의를 김경희로 돌리니까 미안하고 창피했나보다. 이 사람들이 돈이 있다고 하는 아기 아빠(정주영 회장)에게 돈 요구도 안 하고 마음이 착하니 자신이 수많은 여자를 만났는데 이런 사람들이 어디 있나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정 회장이 우리를 사람으로 본 거다.”
임 씨는 정 회장이 왕래한 30년 동안 힘겨워하는 모습을 딱 두 번 봤다고 한다. 임 씨는 “심지어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하고 얼마 뒤 집을 찾을 때도 힘든 내색 한 번 안한 사람이다. 오히려 그런 모습이 우리를 더 슬프게 했었다”고 밝힌다. 그래서 힘들어 하던 정 회장의 모습은 뇌리에 깊이 남아 있다. 첫 번째는 김경희 씨를 만나기 전 일화인 경부고속도로의 난제, 당제터널 공사를 임 씨 앞에서 회상할 때였다.
“정 회장이 박정희 정권 때 경부고속도로 터널을 파는데 자꾸 무너져 인부들이 죽었다. 자꾸 무너지니까 인부들이 아무도 안 들어가려고 하지, 박정희 대통령은 자꾸 압력을 넣지,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이렇게 사느니 투신자살 해야겠다고 죽을 마음을 먹었다고 했다. 정 회장이 죽으려고 한강다리에 올라 뛰어내리려고 할 때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란 마음이 들어 다시 터널로 달려가서 삽을 들고 앞장서서 굴을 파내려갔더니 그때부터 무너지지 않았다. 당시 정 회장이 그때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보이기까지 했다.”
2000년 5월 후계갈등으로 지탄을 받던 정주영-정몽구-정몽헌 3부자. 김경희 씨 모친은 30년 동안 정 회장이 힘겨워하는 모습을 딱 두 번 봤다고 말했다. 일요신문DB
임 씨에게 또 한 번의 인상적인 기억은 정 회장이 말년에 자택에서 가족회의를 갖고 임 씨 집을 찾았을 때다. 임 씨는 그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그는 “정 회장이 자기 집에서 재산 분배 문제로 가족회의를 하는데 ‘몽헌이를 (회장) 시켜야겠다고 말하자 몽구가 제가 장자인데 아버지가 어찌 이럴 수 있느냐고 해서 자동차는 몽구 주기로 했어’라며 힘겨워했다”고 기억했다.
정주영 회장은 생전 문인들과 교류하는 것을 좋아했다. 임 씨는 “시인 모윤숙, 이화여대 총장 김옥길을 비롯해 문학하는 사람을 좋아해 정 회장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인 냉면을 같이 먹곤 했다”며 “남들은 정 회장이 어렸을 때 소도 끌고 농사지었다고 무식하다고 하는데 어렸을 때 공부를 못해도 자기 나름대로 꾸준히 공부를 해서 유식하다”고 전했다. 임 씨는 “정 회장이 평소 시를 쓰기도 하고 영어 공부도 하는 등 꾸준히 공부를 해 영어도 잘했다”고 덧붙였다.
집안에서의 정 회장은 어땠을까. 김경희 씨는 “정 회장이 너무 무서워서 말도 제대로 못할 때가 많았다”며 “밥상이 조금 늦게 들어가자 밥상을 걷어찬 적도 있다”고 회상했다. 김 씨의 모친 임 씨는 “갑자기 정 회장이 ‘저녁 준비해두세요’라며 방문한다는 연락이 오면 준비해둔 반찬이 없어 급히 유명 갈비탕 집에 가서 고기를 구해오기도 했다”고 전했다.
정 회장은 자식 교육에도 완고했다고 한다. 김 씨는 “딸을 사립학교에 보내겠다고 하자 불같이 화를 내며 그런데 다니면 허영심만 들고 애 버린다고 말해 보낼 수 없었다”고 전했다. 임 씨도 “어느 날은 아드님들은 등교를 자동차로 하냐고 묻자 ‘차는 무슨 차냐며 버스 타고 다닌다’고 말했고, 한번은 아들 다리몽둥이가 부러지도록 때렸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며 “아마 아들들이 정 회장의 성격 때문에 고생깨나 했을 것이다”라고 보탰다.
김경희 씨는 “그 분 뜻에만 안 벗어나면 다정다감했다. 아이를 좋아해 애 울리는 것을 끔찍이 싫어했다”며 정 회장의 또 다른 면모를 소개하기도 했다.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