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대선자금 수사 이후 암중모색하던 중수부가 드디어 칼을 뽑아든 것이다. 일단 중수부의 칼날은 한화쪽을 향한 것으로 보이지만 다른 기업들도 마음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한화 수준의 내사가 진행되는 사건이 최소 20여 개는 된다고 중수부에서 공언하고 있고 이중 대부분은 기업이 관련돼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상 초유의 대선자금 수사가 훑고 지나간 서초동은 잠시 고요한 정적이 흐르고 있지만 언제든지 대형 태풍이 다시 몰아칠 수 있는 불안한 상태다. 새롭게 등장할 태풍의 ‘눈’은 대선자금 수사에서 미완으로 봉합된 삼성의 수백억원대 채권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검찰 주변의 분석이다.
대선자금 수사가 마무리된 지난 5월 말 이후 중수부는 팀장이 안대희 현 부산고검장에서 박상길 부장으로 바뀌며 새 진용이 갖춰졌지만 아직 명성에 걸맞은 솜씨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국내 최고 사정기관이라 자부하고 있는 중수부가 그동안 놀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각종 비리 관련 첩보에 대해 끊임없이 내사를 해오며 ‘물건’이 될 만한 사건을 고르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지난달 말 한화에 대한 내사 사실이 확인되면서 중수부가 드디어 물밑작업을 어느 정도 마무리하고 다시 전면에 등장하는 것이 아니냐는 긴장감이 돌고 있는 것이다.
박상길 중수부장은 일부 언론에서 한화그룹 수사설이 보도되자 기자들과 만나 “한화 수준으로 내사가 진행중인 사건은 중수 1~2과에 각각 10여 개는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 중수부장이 이 같은 말을 한 것은 한화에 대한 수사가 언론을 통해 증폭되는 것을 막자는 의도였지만 결과적으로 여러 사건을 만지작 거리고 있다는 것을 털어놓은 꼴이 됐다.
▲ 이건희 삼성 회장 | ||
수사 착수 사실이 언론에 보도된 한화그룹측은 “한화 외에도 몇몇 기업에 대해 중수부가 계좌추적 등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재수없게’ 우리만 공개돼 곤욕을 치르고 있다”고 불만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일부 대기업들은 다시 서초동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안테나를 재가동하기 시작했다.
물론 기업들에 대한 수사가 재개될 것이라는 분석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 검찰의 한 관계자는 “최근 국내 경기가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검찰이 기업들에 대해 강도 높은 수사를 벌이는 것은 부담이 크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조만간 설립될 공직자부패수사처(공수처)에 사정기관의 수장 자리를 뺐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검찰이 다시 한번 힘을 보여줄 것이라는 분석도 만만치 않다.
여기에 검찰은 대선자금 수사에서 기업비리에 대한 수사가 부실했다는 내·외부의 비판을 ‘옥에 티’로 의식하고 만회의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경제를 볼모로 하는 재계의 압박과 수사를 빨리 마무리하라는 정치권의 요구로 분식회계나 변칙적인 부의 세습 등 기업비리에 대해 철저하게 수사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나마 동부그룹 등 명확히 드러난 기업비리 혐의에 대해서도 관련자들을 모두 불구속 처리하는 등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어 체면이 구겨졌다.
검찰은 특히 지난 대선자금 수사를 통해 기업 비리에 대한 상당한 첩보를 이미 확보해 놓고 있다. 중수부 캐비넷에 사건 파일이 수백 개가 넘게 쌓여 있어 여건만 조성되면 언제든지 큰 칼을 다시 뽑을 수 있는 준비가 갖춰져 있는 것이다.
최근 대검 중수부가 수사하고 있다고 거론되는 기업들은 지난 대선자금 수사 때 한 차례 중수부를 거쳐갔던 곳들이다. 한화의 경우 대선자금 수사 때 드러났던 총 90억여원의 채권 중 한나라당과 노무현 캠프에 유입된 60억원을 제외한 사용처 불명의 30억원이 주요 타깃이다. 또 검찰 주변에서 수사설이 솔솔 새나오고 있는 한 건설사도 대선자금 수사 때 된통 혼이 났던 곳이다.
▲ 한화그룹이 대한생명(사진) 인수 로비 의혹으로 수사받고 있다. | ||
이와 관련, 가장 주목받는 기업은 바로 국내 재계 1위인 삼성그룹이다. 사실 지난 대선자금 수사에서 가장 미진했던 부분은 삼성 채권에 대한 수사다. 삼성은 2002년 대선이 있기 직전 명동 사채시장 등에서 총 8백억원대의 채권을 구입한 것으로 확인됐으나 이중 여야 대선캠프 및 정치인들에게 제공된 것으로 확인된 것은 3백억원대에 불과하다. 나머지 5백여억원대의 채권 행방이 묘연한 것이다. 당시 수사팀도 이를 규명해 보려 했지만 삼성이 채권을 관리했던 실무직원들을 해외로 빼돌린 상태였고 대선자금 수사를 서둘러 마무리하려다 보니 미완의 상태에서 뚜껑을 덮어 버린 것이다.
만약 확인되지 않은 5백억원대 채권의 행방에 대한 꼬리가 잡힐 경우 지난 대선자금 수사 이상의 충격적인 상황이 재현될 수도 있다. 채권은 시중에 떠도는 상태에서는 행방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나 채권이 현금화되기 위해서는 결국 마지막에 증권예탁원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 때는 중간 경로에 대한 실마리가 포착될 수 있어 수사가 속도를 낼 수 있다. 이는 시간이 흐르면 해결되는 문제다.
검찰 주변에서는 검찰이 광범위한 기업 수사를 시작한다면 그 시기를 내년 4월 이후로 보고 있다. 내년 4월로 임기가 끝나는 현 송광수 검찰총장이 물러나고 새 총장이 들어와 검찰이 재정비된 뒤다. 그리고 검찰이 기업들을 상대로 다시 한번 큰 칼을 뽑을 때 삼성 채권은 기폭제 역할을 할 가능성이 높다는 게 검찰 주변의 시각이다.
이진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