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순영 당시 장관과 고무라 마사이코 외상의 서명이 선명한 신한일어업협정 ‘합의의사록’ 사본. | ||
일각에서는 “당시 한일어업협정 체결은 1965년 박정희 군사정권이 단행한 한일조약 못지않은 굴욕 외교였다”고 주장한다. 국민의 눈을 속였다는 비난도 나오고 있다.
이와 관련해 최근 <일요신문>은 당시 당시 어업협정의 문제점을 한눈에 들여다볼 수 있는 결정적 증거를 입수했다. 한일 양국의 정부 대표자들이 직접 서명한 협정문 원문 전체의 사본과 국회에서 보관중인 정부 제출 협정 문건이 그것. 결과적으로 두 문건은 서로 달랐다. 국회 상임위에서 보관중인 문건에는 양국 장관이 직접 서명한 ‘합의의사록’이 빠져 있었다.
또한 정부가 발표한 당시 수역도가 이후 일본이 자국 내에서 발표한 수역도와 다른 점도 발견됐다.
이 부분에 대한 명쾌한 해명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당시 국회에 상정된 협정안의 여당 단독 기습 처리를 둘러싼 ‘정치적 음모론’ 등 파문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
<일요신문>은 국회 안팎의 관계자들을 통해 당시 협정문 자료들을 어렵사리 입수했다. 그런데 그 내용에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발견됐다. <일요신문>이 단독 입수한 98년 당시 협정문의 원문(사본)은 전문과 총 17개항의 본문, 그리고 부속서Ⅰ, 부속서Ⅱ, 합의의사록 등 총 5개 문건으로 구성돼 있었다. 본문과 합의의사록 말미에는 양국의 당시 정부 대표였던 홍순영 외교통상부 장관과 고무라 마사이코 외상의 서명이 각각 담겨 있었다. 98년 11월28일자였다.
정부는 양국간에 공식 체결된 조약의 국회 비준을 받기 위해 국회에 이 협정문을 보냈다. <일요신문>이 최근 입수한 1998년도 국회 농림해양수산위원회 ‘의안관계철’에는 12월3일 국회의장 명의로 농림해양수산위원회측에 보낸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어업에 관한 협정비준동의안 관련위원회 회부’란 제목의 공문서가 담겨 있다. 당시 정부측으로부터 국회가 전달받은 한일어업협정에 관한 공식 문건이다. 국회 비준 이전에 해당 문건을 검토해서 문제점이 무엇인지 관련 상임위에게 자문을 구하는 절차였던 셈이다.
국회의장은 이 문건을 전날인 2일 정부측으로부터 받아 당시 통일외교통상위와 농림해양수산위 등 관련 해당 상임위의 의견을 물었다.
그런데 ‘영구보존’이라는 딱지가 붙은 이 문건의 구성을 살펴보면 앞서 언급한 협정문 원문과 다소 차이가 난다. 맨 뒷부분의 합의의사록이 빠져 있는 것.
그렇다면 당시 양국 대표자가 공식 서명한 외교 문서를 왜 모두 국회에 제출하지 않고 합의의사록은 뺀 채 어업협정 내용만 보냈던 걸까. 이에 대해 일각에선 “문제의 합의의사록에 우리의 남해와 관련된 ‘굴욕 외교’의 흔적이 담겨 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왼쪽 ‘합의의사록 내용 살펴보니’ 기사 참조).
어업협장 문제가 쟁점화되기 시작한 것은 양국 대표자의 공식 서명이 있은 직후인 98년 12월부터. 국회에선 예상대로 엄청난 격론이 벌어졌다.
정기국회 속기록 자료를 살펴보면 17개항으로 되어 있는 이 협정문의 내용을 두고 여야간에 심각한 공방이 벌어진 것을 알 수 있다. 가장 주된 시빗거리는 역시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독도의 중간수역 설정에 따른 문제점이었다. 어민들은 생계 수단인 바다 어장을 잃었다고 아우성이었고, 학계에서는 독도를 공동수역화해서 사실상 빼앗겼다고 야단이었다.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에서는 이 같은 여론을 들며 동의안 통과를 막겠다고 공식 천명했다. <일요신문>이 입수한 의안관계철에서도 당시 농림해양수산위의 의견서에는 A4용지 각각 2쪽 분량씩의 찬성입장과 반대입장이 나란히 명시돼 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 공문서에서 나타난 찬반 입장 역시 순전히 어업협정에 대한 내용이었을 뿐 합의의사록은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당시 국회에서는 합의의사록의 존재 자체를 몰랐다는 말이 된다.
이 같은 사실은 당시 해당 상임위 소속 국회의원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 통일외교통상위 소속으로 독도 문제를 들며 가장 강력하게 이 협정안에 대해서 반대하고 나섰던 이신범 전 의원은 “합의의사록은 보지 못했고, 당시에는 어업협정안에 나타난 내용만으로 여당을 공격했다”고 밝혔다. 그는 “당시 여당이 진짜 그렇게 (합의의사록을 숨기려) 했다면 더 더욱 당시 협정안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하는 결과가 되는 셈”이라고 밝혔다.
당시 농림해양수산위 소속이었던 한나라당 권오을 의원측은 “상임위에서 격론을 벌일 때도 합의의사록은 분명 없었다”며 “솔직히 그 이후에 합의의사록의 존재를 알고는 이에 대해 강력히 항의했으나, 이미 국회 통과는 끝난 뒤였다”고 전했다.
▲ 한국정부가 발표한 수역도(왼쪽)와 일본이 자국에 공표한 수역도. 왼쪽 점선 원 안을 보면 ‘한일중간수역(▦ 표시)’이 ‘중일잠정조치수역’ 일부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나와있다. 하지만 오른쪽 일본측 수역도의 같은 부분을 보면 ‘남부잠정수역(南部暫定水域=한일중 | ||
외교통상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합의의사록을 반드시 본 협정문과 같이 묶어서 국회 비준 동의 절차를 밟아야 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다. 두 나라 사이에 체결된 여러 합의문 가운데서도 그 성격상 국회의 동의 절차를 밟아야 할 성격인지 아닌지에 따라서 국회에 보내고 안 보내고를 판단한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의 설명에 따르면 외교통상부 자체적으로 얼마든지 하나의 ‘국제 문서’(설사 양국 대표의 서명이 들어 있는 엄연한 국제 문서일지라도)를 비밀로 묻어둘 수도 있다는 말이 된다. 과연 그럴까.
정부의 국제 문서 처리 절차를 확인한 결과, 이와 같은 경우처럼 외교통상부가 ‘국회 동의 절차가 필요없다’는 일차적 판단을 하면 법제처에서 국익 등을 고려해 최종 판단을 내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 관계자는 “합의의사록은 정치적 문서의 성격이 짙기 때문에 당시 법제처에도 안 보낸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혀 더욱 의혹을 증폭시키고 있다.
의혹은 또 있다. 기자가 확인한 결과, 국회 통과 이후인 99년 1월27일자 ‘관보’에 한일어업협정 내용이 실렸는데 기존의 본문과 부속서 외에 합의의사록이 슬쩍 포함되어 있었다. “굳이 국회 비준 절차를 밟을 필요가 없다”던 외교부 관계자의 말과는 달리, 국회에서 통과된 본문 뒤에 합의의사록을 같이 게재해서 경우에 따라서는 마치 함께 비준 절차를 밟은 것처럼 보일 수 있도록 모양새를 갖춘 셈이다.
이 관계자는 “합의의사록의 내용이라는 것이 대개 ‘~하기로 양국이 서로 노력한다’는 식이기 때문에 설사 노력 안한다고 해서 그것이 정치적으로는 문제가 될지 몰라도 법적으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도 학계에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결과적으로 현재 빚어지고 있는 독도와 교과서 왜곡 문제가 결국은 모두 ‘정치적 문제’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서울대 이상면 교수는 “일본의 경우에는 이 합의의사록을 한일어업협정 본문과 함께 묶어 그 일부분임을 명확히 한 채 국회 비준 동의 절차를 같이 밟았다”면서 “합의의사록은 우리가 이행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문서가 아니라 우리가 일본과 함께 행동해야 할 규준을 명문화한, 문서로 된 합의”라고 지적했다.
한일어업협정을 둘러싼 의혹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있다. 당시 우리 정부가 발표한 수역도가 일본이 자체적으로 발표한 수역도와 적잖은 차이가 났던 것. 이 교수가 입수한, 당시 일본국 외무성 조약국의 스기야마 조약과장이 자국에서 발표한 공표문을 보면 제주도 남쪽 해상에 그려진 ‘한일중간수역’과 ‘중일잠정조치수역’ 그림이 우리 것과는 다르게 그려져 있다(위쪽 수역도 비교 참조).
이처럼 갈수록 한일어업협정에 대한 석연치 않은 문제점들이 대두되면서 일각에서는 갖가지 정치적 의혹도 쏟아지고 있다.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일본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한 이 같은 협정안을 당시 여당이 왜 일부는 감춰가면서까지 단독 통과를 강행했는지에 대해 의문이 잇따르고 있는 것.
김봉우 독도역사찾기운동본부 위원장은 “당시 뉴스 보도를 보면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일본으로부터 30억달러의 차관을 받은 것으로 나와 있는데, 그 정도 조건만으로 어업협정을 그렇게까지 양보했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또한 권오을 의원측은 “분명히 당시의 어업협정안은 우리의 저자세 외교의 산물이었다. 그 이면에 무엇이 있었는지 의심은 가지만, 의심만으로 문제 제기를 하긴 어렵다. 당시 협상 테이블에 있었던 당사자들만이 알 것”이라고 밝혔다.
이신범 전 의원은 “외교 협상에는 항상 전문가보다도 최고 결정권자의 의중을 가장 잘 대변할 수 있는 특사 또는 밀사가 나서게 마련이다. 지난 65년 한일회담도 실무자 협상보다는 오히려 정권 실세인 김종필-오히라의 밀실 합의로 이뤄지지 않았나. 그렇다면 지난 98년 한일어업협상 때도 실무자가 아닌 특사 형식의 정치권 실세 인사가 서로 양국을 오갔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권에서는 실제 98년 2월 김대중 정부 출범 직후부터 대통령의 의중에 따라 일본을 서너 차례 오가며 일본측 실세인 자민당의 S의원과 활발하게 사전 협상을 벌인 K 전 의원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다. 이 전 의원은 “당시 K의원은 일본통이라는 점과 대통령 최측근이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이 문제에 관한 한 전문가로 보기 어려운 인물”이라고 전했다.
기자는 K 전 의원과 인터뷰를 시도했으나, 그는 사무실 관계자를 통해 “정계를 떠났기에 언론과 인터뷰할 생각이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일각에서는 “당시 협정안 통과를 들어 무작정 김대중 정부만을 비난하는 것은 무리”라는 지적도 나온다. 65년 맺어졌던 한일간의 어업협정에 대한 파기 움직임과 함께 우리를 압박했던 일본과 협상을 벌이기 시작한 것은 YS정권 말기부터였고, 당시 IMF 사태 등 어려운 상황에서 정권을 인수한 DJ로서는 일본과 큰 마찰없이 최대한 원만히 협상을 이끌어내는 것이 국가적 절대과제였다는 것.
당시 협상 실무자로 참석했던 외교통상부 관계자의 “일본에게 우리의 주장만을 계속 고집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말은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뒤집어 보자면 일본측의 ‘요구’를 수용한 사실을 인정하는 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