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용성 두산그룹 회장 | ||
이런 가운데 두산그룹의 전직 고위임원이었던 A씨는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두산 비자금 사건의 핵심은 지난 2000년 두산이 한국중공업(한중)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정·관계 인사들에 전방위로 로비했던 것”이라고 증언했다. 그는 “한중을 인수하기 위해 여야 정치인 4명과 산자부 고위 공무원 등에게 로비했다”며 “당시 임원들 사이에선 2백억원대의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얘기가 나돌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현재 검찰이 포착한 2000년 이후의 두산 비자금 1백억원대보다 더 많은 비자금이 이전에도 조성된 게 아니냐는 새로운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한중의 민영화 방침이 처음 발표됐던 것은 지난 1988년 9월. 정부는 한중의 경영악화로 어쩔 수 없이 매각에 나섰으나, 두 차례 유찰돼 민영화에 실패했다. 그리고 1993년 12월, 주식시장 침체 등으로 한중의 민영화는 유보됐다. 그러다가 지난 1997년 10월, ‘2003년 공기업 민영화법’이 제정됐다. 이는 공기업을 2003년 이후에나 민영화한다는 방침이었다.
하지만 1997년 말 IMF 체제에 돌입하면서 정부의 공기업 민영화 방침은 앞당겨졌다. 1998년 7월, 한중의 지분 매각 방식에 의한 완전 민영화 방침이 결정됐다. 이에 삼성과 현대, 두산 등이 한중 인수전에 뛰어들었고, 2000년 12월 두산그룹에 최종 낙찰됐다.
그런데 전직 고위 임원이었던 A씨는 “두산에서 로비했던 정·관계 인사들이 한중을 인수할 당시 법령을 수정해가며 협조해줬다”고 주장했다. 1997년 제정된 공기업 민영화법에 따르면, 대기업이 민영화되는 공기업을 인수할 수 없도록 규정돼 있었다. 그런데 1999년 이 법에는 ▲자산규모가 40조원 이상인 대기업은 공기업 인수 불가 ▲동종업체(중공업)를 소유하고 있는 기업도 인수 참여 자격이 없다 등의 조항이 신설됐다. 당시 한중 인수전에 나섰던 삼성과 현대그룹 등은 이 두 조항에 모두 해당하는 기업이었기 때문에 인수 자격이 없어진 셈이다. 그 결과 자연히 두산이 한중 인수전에서 유리한 고지에 올라섰던 것이다. 이에 재계에선 한중 인수와 관련해 ‘두산 특혜설’이 나돌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에 A씨의 증언을 통해 당시 두산이 한중 인수를 위해 어떤 식으로 로비를 펼쳤는지 그 일단을 확인할 수 있었다. A씨는 “한중을 인수하려 했던 박용성 회장이 박용만 부회장과 로비스트로 활동했던 B씨 등을 통해 정·관계에 로비를 벌였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박 회장의 지시에 따라 박 부회장과 B씨 등이 정·관계 로비에 나섰다는 주장이다. B씨는 이후 두산의 고위 임원을 지냈던 것으로 알려졌다.
A씨의 제보에 따르면, 박 부회장은 당시 여당의 C의원과 또 다른 여당 의원, 야당 의원 두 명 등을 극비리에 접촉, “대기업도 민영화하는 공기업을 인수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박 부회장이 로비를 펼쳤던 것으로 전해진 C의원은 현재 고위공직자로 근무하고 있으며, 나머지 여야 의원 3명은 지난해 총선에서 낙선, 정치권과는 거리를 두고 있는 상태다.
▲ 옛 한국중공업 사옥 | ||
박 부회장과 함께 로비에 나섰던 B씨는 앞서 언급했던 여야 의원들의 보좌진을 대상으로 ‘민영화법 개정’을 위한 로비를 벌였다고 한다.
A씨의 증언대로 두산그룹의 전방위 로비가 통했던 것일까. 두산은 마침내 한중을 인수하는 데 성공했다. 여기서 A씨의 증언을 더 들어보자.
“당시 몇몇 의원들뿐만 아니라 산자부에도 민영화법 개정 작업을 벌였다. 그런데 법안 개정은 정부입법이 아닌 의원입법 형태로 이뤄졌다. 결국 이 같은 법 개정을 통해 두산그룹이 한중을 인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 그룹 일각에선 한중 인수를 위한 로비 자금으로만 1백억원 이상이 지출됐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특히 임원들 사이에선 2백억원 이상이 비자금으로 조성돼 로비자금으로 뿌려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고 말했다.
A씨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검찰이 포착한 2000년 이후의 비자금 1백억원대보다 더 많은 비자금이 2000년과 그 이전에도 조성됐을 가능성이 큰 셈이다. 따라서 향후 검찰이 이 같은 의혹에 대해서도 수사에 나설지 주목된다.
A씨는 이와 함께 “두산그룹은 한중을 인수한 다음에도 정·관계 인사들을 지속적으로 관리했다. 이렇게 계속된 로비 활동으로 두산은 이후에도 법정관리중이던 고려산업개발과 대우종합기계 등 알짜기업들을 차례로 인수할 수 있었다”며 “한국중공업을 인수한 후 두산중공업으로 회사명을 바꾼 다음 두산중공업의 자금 6천억원을 빼내 그룹 내의 부실기업에 부당지원했고, 법정관리중이던 고려산업개발 인수자금으로도 활용했던 것으로 안다. 또한 고려산업개발과 두산중공업 자금을 이용해 대우종기도 인수했던 것으로 들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두산그룹 관계자는 “금시초문이다.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면서 “한중을 인수할 당시 두산의 규모는 작았다. 정치권에 로비해서 법을 바꿀 정도의 힘을 갖고 있진 않았다”며 2백억원대 비자금 조성설과 정·관계 로비 의혹을 강하게 부인했다. 그러면서 이 관계자는 “(비자금 조성과 로비) 가능성은 있겠지만, 물증이 없지 않은가”라고 반문했다.
이 관계자는 전직 고위 임원 A씨가 고소전의 상대인 박용오 전 회장측 사람이 아니냐면서 폭로 배경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A씨는 이른바 ‘형제의 난’에 연루될 정도로 박씨 형제와 가까운 인사는 아니라는 게 두산 사정에 밝은 이들의 평이다.
과연 A씨의 주장은 사실일까. ‘진실’ 규명은 이제 검찰의 몫으로 남겨지게 됐다.
김지영 기자 you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