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대기업 창업주들 중에서 비교적 좋은 이미지로 알려진 고 L회장 일가에게 숨기고 싶은 가족사가 있었던 셈이다. 묻어둔 가족사를 꺼내든 이 자매는 현재까지도 ‘정신적·물질적 보상’을 받기 위해 D그룹 문을 두드리고 있다.
지난 50년대 설립된 D그룹은 현재 제조업부터 금융, 엔터테인먼트 등을 아우르는 초대형 재벌그룹으로 성장했다. D그룹 창업주인 고 L회장 슬하엔 아들 없이 딸만 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두 딸은 모두 출가했으며 그 사위들이 각각 D그룹의 핵심 일꾼으로 일하고 있다.
그런데 고 L회장에겐 세 명의 딸이 더 있다. 이른바 ‘숨겨진’ 딸들이다. 첫째와 둘째는 본부인 E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들이다. 셋째 딸은 다른 여인과의 사이에서 얻었으며 넷째와 다섯째도 위의 언니들과 다른 어머니를 두고 있다. 고 L회장에겐 자식까지 낳아준 부인이 밝혀진 것만 두 명 더 있었던 셈이다.
E씨가 낳은 딸들은 아니지만 셋째 넷째 다섯째 딸은 태어날 당시 모두 L회장과 부인 E씨를 부모로 해서 입적됐다. 셋째 넷째 다섯째에게 E씨는 호적상 어머니였지만 사실상 ‘큰어머니’였던 셈이다.
그러나 지난 1988년 셋째 넷째 다섯째 딸들은 E씨와 호적상으로 결별하게 된다. 이들 호적에 E씨 이름 대신 이들의 생모 이름이 오르게 된 것이다. 이것은 이들 딸들에 대한 호적상 결별 수순 단계였다. 얼마 후 이 세 딸들은 고 L회장 호적에서 완전히 지워진다. 이때부터 이 세 딸들의 호주는 더 이상 L회장이 아니게 된 것이다.
그동안 D그룹 대문을 수차례 두드려온 다섯째 딸은 <일요신문>과의 전화통화에서 “큰어머니가 상속문제 때문에 우리 자매를 호적에서 지워낸 것 같다”고 밝혔다. 당시 이들 자매의 친어머니가 했던 사업이 어려움에 빠지자 D그룹에서 10억원을 받는 조건으로 상속권 포기 각서에 서명을 했다는 것이다. 다섯째 딸에 따르면 각서는 지난 87년 작성됐으며 당시 넷째는 우리 나이로 21세, 다섯째는 19세이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989년 고 L회장은 세상을 떠나게 된다. 다섯째 딸은 아버지 L회장에 대해 “아버지는 할 만큼 하셨다”고 밝힌다. 이들 자매가 자랄 당시 비록 한집에 살 순 없었지만 아버지인 L회장이 자주 돌봐준 덕에 제법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다섯째 딸은 자신들이 호적에서 지워진 것은 모두 L회장 본부인 E씨 의지로 이뤄진 일이라 보고 있다. 이후 D그룹의 재산이 E씨의 두 딸에게 오롯이 상속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L회장 작고 후 4년이 지난 93년 넷째와 다섯째 딸 자매의 친어머니가 49세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두면서 이들 자매는 경제적 어려움을 맞이하게 된다. D그룹측과 상속포기 각서를 작성하며 받은 10억원과 그 전에 친어머니가 사업보조 비용으로 L회장으로부터 받았던 10억원을 합한 20억원에 대한 증여세 부담이 이들 자매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상속포기 대가로 각서까지 만든 이들 자매가 어째서 증여세 부과를 받게 된 것일까. 다섯째 딸은 각서 내용이 L회장 사후 상속받을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지 그동안 받은 돈에 대한 증여세를 피해갈 수는 없게 작성돼 있었다고 주장한다.
당시 청구된 증여세는 5억원이었다고 한다. 친어머니가 남긴 재산은 전셋집이 고작이었기 때문에 이때부터 생활능력이 없던 자매는 증여세 납부에 대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들 자매는 이때부터 D그룹 대문을 자주 두드리게 됐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문전박대’뿐이었다고 한다.
다섯째 딸은 한때 법적대응도 고려했다. 그러나 자신의 친어머니와 이들 자매가 직접 서명한 각서 탓에 법적으로 D그룹측에 돈을 더 요구할 명분도 없었다. 이런 탓인지 D그룹측 인사는 자주 찾아오는 다섯째 딸에게 “법대로 하라”는 말만 전할 뿐이었다고 한다.
몇 해 전 다섯째 딸은 한 월간지에 자신의 사정을 호소하며 D그룹측에 증여세 부담을 덜어달라는 내용의 인터뷰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기사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고 한다. 다섯째 딸은 “당시 D그룹이 해당기사가 실린 매체를 싹쓸이해갔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 무렵 D그룹측이 증여세에 대한 일부 금액을 부담했지만 다섯째 딸은 “아직 증여세가 1억5천만원 남았다”고 주장한다. 다섯째 딸은 “증여세를 제대로 갚지 못해 지난 10년간 신용불량자로 살았다. 좋은 남편 만난 덕분에 생활에 큰 지장은 없었지만 그동안 입은 정신적 육체적 상처가 크다”고 주장한다. 그동안 큰 수술을 몇차례 받았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됐다가 최근에 호전됐다는 다섯째 딸은 “최근엔 언니(넷째 딸)가 생활이 너무 어렵다. 경제적 문제는 물론 가정에도 불화가 생겨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밝힌다.
다섯째 딸은 지금도 D그룹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그는 “증여세 1억5천만원은 D그룹에서 꼭 보상해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호적에서 우리 자매 이름이 지워진 것에 대한 사과도 받고 싶다. 친아버지 이름이 호적에서 지워지면 우리나라 사회에서 어떤 어려움을 겪는지는 말 안해도 다 알 것이다. 내 건강이 악화됐던 것도 언니 상태가 그렇게 된 것도 원인은 모두 D그룹의 그분이 우리 자매에게 준 고통 때문이다”라고 밝혔다. 그간의 ‘고통’에 대한 ‘배상’을 받는다면 친자확인소송 등 법적인 명예회복은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