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의 자회사인 큐알티 매각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팬택씨앤아이의 갑작스런 인수 포기로 새 국면에 돌입했다. 연합뉴스
박병엽 팬택씨앤아이 부회장이 SK하이닉스 자회사인 큐알티 인수를 포기했다(8월 6일 <일요신문> 온라인판 단독보도). 지난 6일 SK하이닉스 관계자는 “팬택씨앤아이에서 어제(5일) 큐알티 인수 포기 의사를 밝혀왔다”며 이를 인정했다.
SK하이닉스는 수개월 전, 자회사인 큐알티를 매각하겠다는 방침을 정하고 지난 7월 초 박병엽 부회장의 팬택씨앤아이를 인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했다. 지난 7월 16일부터 29일까지 큐알티에 대한 실사를 진행한 팬택씨앤아이는 돌연 인수를 포기해 의아함을 자아냈다. 큐알티 인수는 차기 스포츠토토 수탁사업과 함께 박 부회장에게 재기의 발판으로 인식돼왔기 때문이다.
지난해 9월 팬택 경영 실패의 책임을 지고 대표직에서 물러난 박 부회장이 개인회사나 다름없는 팬택씨앤아이를 통해 큐알티를 인수함으로써 사업 영역을 넓힐 수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 적잖았다. 팬택씨앤아이는 박 부회장이 100% 지분을 갖고 있는 휴대용 이동통신단말기 부품 개발 유통·시스템 통합관리 업체다.
박 부회장은 실사 후 자신이 잘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라는 판단에 따라 인수를 포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재계 일각에서는 “여론이 부담된 듯하다”고 진단했다. 박 부회장이 큐알티를 인수하겠다고 나서자 일부에서는 ‘어려움에 빠진 팬택을 버리고 자신의 개인회사를 발판으로 다시 일어서려 한다’는 비난이 적지 않았다.
또 SK하이닉스가 박 부회장의 팬택씨앤아이를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한 것에 대해 최태원 SK 회장과 박 부회장의 ‘남다른’ 관계에서 비롯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지난 2004년 SK가 ‘소버린 사태’로 경영권 위협을 받았을 때 팬택이 백기사로 나선 것은 유명한 일화다. 또 2005년에는 박 부회장과 최 회장이 직접 만나 팬택의 SK텔레텍 인수에 합의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 같은 이유로 최 회장과 박 부회장은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알려져 있다.
박병엽 팬택씨앤아이 부회장
일반적인 인수합병(M&A)이라면 우선협상대상자가 인수 포기 의사를 밝히거나 교체될 경우, 차순위업체가 우선협상대상자 지위를 얻는다. 차순위는 전자제품 규격인증시험 업체인 HCT가 선정됐다. 업계에서는 HCT가 곧 큐알티 실사에 돌입할 것으로 보고 있으며 8월 말쯤 인수 여부를 결정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큐알티 직원 중에는 매각에 대한 불안감을 표출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큐알티 한 직원은 “자회사로 남는 것이 좋지만 본사의 매각 의지가 강경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면서 “매각이 결정된 초기에는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매각 반대 의사를 밝혔으나 지금은 투명하고 공정한 매각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했다.
재계 일부에서는 SK하이닉스의 큐알티 매각이 납득하기 힘든 일로 여겨지고 있다. SK하이닉스가 경영에 어려움을 겪거나 유동성 위기에 직면한 것도 아닌데 잘나가는 자회사를 매각할 이유가 있느냐는 것이다. 큐알티는 업계 1위를 달리고 있으며 연평균 12% 이상 성장률을 보이고 있는 ‘알짜회사’다. SK하이닉스와 시너지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오히려 합병하면 했지 매각할 회사는 아니라는 의미다.
특히 SK하이닉스는 최고 실적을 보이고 있는 데다 전망 또한 밝은 편이다. 재계 관계자는 “보통 매각을 결정할 때는 유동성 위기에 직면하거나 구조조정의 필요성이 대두된 때”라면서 “실적과 전망이 계속 좋은 회사는 하나라도 더 하려고 하면 했지, 하고 있는 사업을 내놓지 않는다”고 말했다.
SK하이닉스의 겉모습은 화려하다. 지난해부터 사상 최고 실적을 거듭하면서 SK그룹과 최태원 회장에 큰 보탬이 되고 있다. 주가도 고공행진하면서 옛 현대전자 시절인 1997년 6월 19일 최고가였던 4만 9600원을 깨기도 했다. 지난 7월 17일에는 옛 현대전자 시절을 포함해 역대 하이닉스 최고가인 5만 2400원까지 올랐다. SK가 인수하던 당시인 2011년 말~2012년 초와 비교하면 무려 2배 가까이 상승했다.
지난해부터 SK그룹 계열사들이 대부분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하이닉스의 사상 최대 실적 기록은 SK그룹을 지탱하는 힘이 되고 있다. SK그룹 직원 사이에서 “하이닉스가 없었으면 어쩔 뻔했나”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하이닉스 인수를 결정한 최태원 회장의 결단력과 추진력이 평가받을 정도다.
이 같은 상황에서 SK하이닉스는 자회사 매각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SK하이닉스 관계자는 “아쉽지만 시장 경쟁이 격화하면서 큐알티에 독자생존의 길을 열어주고 더 큰 장을 마련해주기 위한 것”이라며 매각 의미를 설명했다. 즉, 선제적 의미라는 얘기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업계 특성상 반도체업체들은 기밀이 새어나가는 것을 가장 경계한다”며 “하이닉스 역시 마찬가지여서 비록 자회사지만 보안·기밀 유지 때문에 큐알티 매각을 결정했을 수 있다”고 전했다.
직원들 간 불륜 사건이 내부에서 한바탕 소란을 불러일으킨 것도 모자라 사진과 함께 외부로 유출된 것도 SK하이닉스로서는 치명적인 일이다. 사상 최대 실적도 중요하지만 내부 단속과 화합도 중요하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