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감독들은 성적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물론 때에 따라 프런트와의 알력 싸움도 한다. 지난 7월 18일 프로야구 올스타전이 끝난 뒤 각 팀 감독들이 인사를 나누는 모습. 사진제공=SK와이번스
# 도 넘은 팬심
지금은 현장을 떠난 A 감독의 사례다. 사령탑으로서 첫 시즌이 시작된 지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았던 어느 날, 아내의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아내는 “감독 되면서 받은 계약금과 이달에 들어온 월급까지, 계약 이후 받은 돈을 모두 통장으로 보냈으니 빨리 구단에 돌려주라”고 했다. 지휘봉을 내려놓고, 집으로 돌아오라는 얘기였다. 이유가 있다. A 감독이 부임하자마자 시즌 초 팀 성적이 곤두박질쳤다. 당장 팬들의 욕이란 욕은 다 쏟아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번호를 알았는지, 감독의 개인 휴대전화는 물론 집 전화까지 울렸다. 웬만한 일에는 허허 웃어 버리던 A 감독도 하루하루 얼굴빛이 시커멓게 변해갔다. 심지어 한 번은 아무 말 없이 딸의 이름과 학교, 학년과 반을 적은 문자 메시지가 도착하기도 했다. 이 정도면 ‘팬심’을 넘어 처벌이 가능한 악의적 협박에 가깝다. 이를 보다 못한 아내가 “감독 자리도 좋지만 사람이 사는 게 먼저”라며 용단을 권유한 것이다.
다행히 팀이 서서히 다시 상승세를 타면서 팬들의 비난은 환호로 바뀌었다. “그때 욕해서 미안하다”며 찾아와 큰 절까지 하는 팬도 생겼다. 그러나 A감독은 “좋을 때도 마냥 웃을 수는 없다.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마음을 비운 지 오래”라며 씁쓸하게 웃곤 했다. 지금 쏟아지는 박수가 언제 다시 화살로 변해 자신을 겨눌지 모른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일희일비
성적이 좋다고 늘 행복한 것도 아니다. 한국시리즈 우승을 경험한 B 감독은 “남들이 들으면 욕할지 몰라도, 우승팀 감독의 스트레스 또한 엄청나다. 더 올라갈 곳이 없이 계속 유지를 해야 하고, 2위만 해도 이전보다 못한 게 되기 때문”이라고 토로했다. 몇 년 전 팀을 4강으로 이끈 C 감독도 “팀 성적이 좋을 때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직업, 그렇지 않으면 가장 불행한 직업이 바로 프로야구 감독이다. 지금은 내가 행복한 감독이지만, 당장 몇 달 후에 얼마나 불행해질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이 자리가 힘들다”고 고백했다.
실제로 감독의 스트레스는 1년 내내 쉬지 않고 이어진다. 승패에 따라 1주일에 6일을 일희일비할 수밖에 없고, 매일 자신의 선택과 말에 대해 평가받고 책임져야 한다. 한 감독이 웃는 순간, 반드시 다른 한 감독은 울게 된다. 성공했을 때 얻는 찬사보다 실패했을 때 받는 비난이 훨씬 더 큰 건 당연지사. 야구의 인기가 높아진 만큼 감독이 감당해야 할 부담은 더 커졌다. 대부분의 감독이 “위장병과 불면증은 기본으로 달고 산다”고 털어 놓는 이유다. 일부 감독은 신경안정제를 복용하기도 한다.
2002년 7월 17일 열린 프로야구 올스타전에 참가한 김인식, 김응용, 강병철, 백인천 감독.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간섭하는 사장과 멱살잡이?
몇 년 전 D 감독이 당시 구단 사장인 E 씨와 사무실에서 멱살잡이를 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서로 ‘강성’인 데다 평소에도 팀에 대한 생각이 잘 맞지 않았던 이들의 불화가 마침내 표면 위로 떠올랐다는 것이다. 모기업에서 ‘낙하산’으로 내려온 E 사장이 현장 일에 지나치게 간섭해왔다는 얘기도 나왔다. E 사장은 소문을 진화시키기 위해 일부러 더그아웃에 나와 감독을 독려하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E 사장과 악수를 나누는 D 감독의 얼굴은 썩 밝지 않았다. 이후에도 두 사람은 거의 말을 나누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 시즌은 일단 별다른 일 없이 무사통과. 그러나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사장이 교체됐고, 감독도 그 팀을 떠났다.
사실 감독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순간은 프런트와 알력 싸움을 해야 할 때다. 필요한 부분을 알아서 지원해주고 서로 추구하는 방향이 같은 프런트를 만난다면 감독의 가장 큰 스트레스 하나가 줄어드는 셈. 반대로 현장의 요구는 들어주지 않으면서 성적이나 경기 결과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우려는 프런트를 만나면 계약기간 내내 고달파진다. 같은 팀인데 ‘내 편’은 아닌 상황. 외부의 적과 싸우는 것보다 더 어렵다. 최근 한국 프로야구가 프런트 중심으로 바뀌고 있어 더 그렇다.
#스트레스로 병 얻기도
과거에는 실제로 스트레스와의 전쟁에서 결국 패한 감독도 많았다. 롯데 사령탑이던 고 김명성 감독은 순위싸움이 한창이던 2001년 7월 24일에 세상을 떠났다. 승부에 대한 스트레스로 인해 연일 폭음과 줄담배가 이어졌고, 결국 급성 심근경색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1997년 6월에는 백인천 당시 삼성 감독이 고혈압과 뇌출혈로 더그아웃을 떠났다. 한 달 만에 다시 돌아오긴 했지만, 그해 9월 3일 LG와의 더블헤더 제1경기를 마친 뒤 제2경기 지휘를 포기하고 자진사퇴했다. 1999년 한화를 창단 첫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끈 이희수 감독은 그해 중반부터 귀 뒷부분에 종양이 자라기 시작해 결국 이듬해 수술을 받았다. 건강상의 이유로 재계약도 하지 못했다. 2004년에는 김인식 전 한화 감독이 뇌경색 진단을 받았다. 원인은 모두 스트레스와 밀접하게 연관된 신경계통의 질병 때문이었다.
요즘 감독들도 스트레스를 호소하기는 마찬가지다. 성적 앞에선 장사가 없다. 팀 성적이 안 좋으면,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 감독도 ‘영웅’에서 ‘역적’이 되기 일쑤다. 그렇다고 마음 편히 술 한 잔 하며 지인들과 애환을 나누기도 어렵다. 스마트폰과 인터넷이 지나치게 발달한 탓에, 자칫하면 극성팬들의 레이더에 걸려 괜히 욕만 더 먹기 십상이다. 무엇보다 정말 힘들 때는 주변의 위로조차 도움이 안 된다. 격려하는 말들도 듣기 싫어진다. 결국은 혼자 책임지고 결정해야 하는 고독한 자리라서다.
평소 산책을 즐기는 한화 김응용 감독은 아무도 없을 때 허공을 향해 고함을 지르고 욕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풀기도 한다. 그런데 어느 날은 문득 기분이 이상해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사람들이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더란다. 애써 태연한 척 발걸음을 옮겼지만 뒤통수가 따끔따끔. 쌓이는 스트레스는 산더미인데, 마음에서 한 번 덜어내기가 이렇게 어렵다.
배영은 스포츠동아 기자 yeb@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