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년여의 도피생활 끝에 지난해 귀국해 구속 수감된 김우중 전 회장. 그의 은닉재산 논란이 다시 불거지고 있다. | ||
2005년 예금보험공사에 한 건의 제보가 접수됐다. ‘김우중 전 회장이 93년 경기도의 석재공장 D사를 대우 전 임원 S 씨 등의 명의로 매입한 뒤 이곳에 자동차 정비소를 차렸다’는 것과 ‘99년 김 전 회장의 해외도피와 대우그룹 붕괴를 계기로 차명 주주들이 정비소가 자신들의 것인 양 행세한다’는 내용. 주장을 뒷받침할 기안문, 포기각서 등 각종 관련 서류들이 봉투에 함께 담겨 있었다.
대우그룹에 막대한 공적자금이 투입된 만큼 만약 사실이라면 끝까지 추적해 환수해야 할 사안. 하지만 예금보험공사는 1년여가 흐른 지금까지도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정황상으로는 정비소가 김우중 전 회장이나 대우의 은닉 재산으로 보이지만 법적으로 증명이 힘들다’는 입장이다. 그도 그럴 것이 김 전 회장의 은닉 재산으로 여겨져 왔던 아도니스 골프장, 하이마트 등과 관련된 소송에서도 법원은 번번이 “김 전 회장의 재산으로 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전 대우 기조실 임직원들이 D사는 ‘명백한 대우 재산’이라는 주장을 내놓으면서 논란은 더욱 불붙고 있다. 물론 D사의 현 소유자인 ㈜대우 전 임원 S 씨는 “김 전 회장에게 잠깐 돈을 빌렸을 뿐, 내 재산”이라고 항변하고 있다. 현재 D사의 부동산 시가는 60억 원. 인근 부동산업자는 “2년 전부터 매물로 나와 있는 물건”이라고 일러줬다.
93년부터 대우 붕괴 직전까지 대우자동차 정비소와 부품창고 등으로 쓰였던 D사. 10여 년 전 D사를 둘러싸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기자는 예금보험공사에 접수된 서류를 옛 대우 관계자로부터 어렵사리 확보했다. 서류는 정비소 기안문, 주식양수도 내역, 유상증자 영수증, (주식)포기각서로 이뤄져 있었다.
우선 기안문은 대우자동차 자판ㆍ관재 부문에서 92년 9월 24일 D사 부지 매입비 산정과 매입 방법 등을 적은 것. D사 공장부지 5923평과 D사 소유 인근 농지 3831평을 인수하는 데 각각 24억 원과 13억 원이 들었다는 내용이 기재돼 있다. 특이할 만한 점은 24억 원은 ‘기조실 관리팀에 의뢰’라고 적혀 있는 것. 24억 원의 자금을 대우차가 아닌 그룹 기조실에서 조달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하는 대목이다.
주식양수도 내역은 D사 전 소유자와 친인척에게 S 씨와 S 씨의 친구 G 씨, 당시 기조실 직원 N 씨 등 3명이 4만 6000주를 4억 원에 넘겨받았다는 내용이다. 지분율은 S 씨 49%(1억 9600만 원), G 씨 49%(1억 9600만 원), N 씨 2%(800만 원)다. 유상증자 영수증에는 S 씨가 93년 11월 23일 유상증자 대금 5억 원을 영수하는 내용이 기재돼 있지만 정작 영수증을 받는 대상은 적혀 있지 않다.
이는 S 씨 등 3인이 쓴 포기각서에서도 마찬가지. 포기각서에는 “본인이 보유하고 있는 D사 발행주식 ○○주는 귀하의 소유임을 확인하고 귀하가 요청할 시에는 한시라도 아무 조건 없이 주식을 명의변경하겠음을 약속하며 이를 증하기 위하여 본인이 인감증명을 첨부, 이 각서를 작성ㆍ제출합니다”라고 적혀 있지만 받는 주체가 공란으로 남아 있다. 작성 시점도 93년으로만 돼 있고 월·일은 기재되지 않았다. 다만 D사의 주식을 넘겨받은 3명 중 한 명인 N 씨는 “명의 변경시 관련 세금은 본인 부담이 아니다”라고 기재해 명의만 빌려줬을 수도 있다는 의혹을 낳게 한다.
그는 그룹 기조실에서 D사를 위장계열사로 만들기 위해 대우 계열사 전 임원 S 씨 등 3명을 내세워 주식을 전 소유자로부터 4억 원에 넘겨받았으며 이후 대우그룹에서 수십억 원을 들여 정비시설 및 부품 창고 등을 설치한 뒤 D사 경영자금으로 5억 원을 유상 증자했다고 설명했다.
당시 기조실 임원 K 씨의 증언은 더욱 구체적이다. K 씨는 자신이 대우 위장계열사 관리자였다며 입을 뗐다. 그의 말대로라면 대우 위장계열사는 한때 60여 개였다. 이미 법정에까지 오른 하이마트 등을 비롯해 S생명보험, S제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는 것. 다만 위장계열사는 대우나 김우중 전 회장의 은닉 재산이 아니라 정부의 규제를 피하기 위한 방법이었다는 설명이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부터 대기업들은 주력업종이 정해져 있었던 터라 그 이외 업종에는 진출이 힘들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대우는 무역, 건설, 기계, 조선으로 주력업종이 정해진 셈이었다. 하지만 그룹 입장에서는 시너지 효과 때문에 다른 업종도 해야 했고 위장계열사라는 편법을 쓰게 됐다는 것이다.
K 씨는 “D사도 대우차가 정비소 사업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위장계열사로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유상증자금 5억 원은 김우중 회장의 비서격인 경리직원에게 받아서 직접 S 씨에게 넘겼다”며 “유상증자 영수증과 포기각서도 직접 내가 받았다”고 털어놨다. 3명이 함께 지분을 넘겨받은 것은 국세청의 자금출처 조사를 피하기 위한 방편이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C 씨와 K 씨의 주장대로라면 D사는 대우그룹이나 김 전 회장의 숨은 재산인 셈이다. 하지만 문제는 서류상으로 남아 있는 4억 원(주식양수금액)과 5억 원(유상증자금액) 등 총 9억 원 이외에 나머지 공장과 농지 매입에 필요한 33억원의 자금거래를 확인할 방도가 없다는 점이다. 또 현 소유자인 S 씨 등이 도대체 누구에게 유상증자 영수증과 포기각서를 써줬는지도 불분명하다.
C 씨는 “4억 원은 주식대금으로 지불하고 20억 원은 비공식적으로 준 걸로 알고 있다. 인근 농지는 어떻게 인수했는지 모른다”며 나머지 금액의 출처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K 씨도 “30억 원은 단지 비공식적으로 갔을 것이라고 추정할 뿐”이라고 털어놨다. 또 유상증자 영수증과 포기각서를 받은 당사자가 기재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도 “당시는 돈을 전달하는 역할만 했기 때문에 돈의 출처가 ㈜대우인지 대우자동차인지 김우중 회장인지 알 수 없었다”며 “나중에 받은 주체만 채워 넣으면 됐는데 갑작스런 대우 붕괴 때문에 그럴 겨를이 없었다”고 말했다.
▲ 대우 혹은 김우중 전 회장의 은닉재산 의혹을 받는 D사의 대주주 N 씨와 S 씨가 쓴 각서와 유상증자 금액 5억 원을 받았다는 영수증(왼쪽부터). 정확한 날짜 혹은 받는 사람의 이름이 없다. | ||
실제로 D사의 전 소유주였던 H 씨도 “당시 은행 빚을 넘기는 조건으로 3억~4억 원을 받고 판 기억이 있다”고 말해 S 씨의 주장에 힘을 실어줬다. 또 S 씨가 대우자동차에서 협력자금으로 20억 원을 받았다가 대우 붕괴 직후 자금 회수에 들어가자 땅으로 대신 갚은 기록도 남아 있다.
그러나 포기각서 작성 경위는 3명 모두 말이 엇갈린다. 우선 S 씨의 친구인 G 씨는 “친구 S 씨가 투자하라고 해서 3억여 원을 투자했을 뿐 D사는 모른다. 포기각서를 써 준 것도 S 씨가 D사를 M&A로 판다고 해서 편의상 S 씨에게 써 준 것”이라고 주장했다. N 씨는 “포기각서는 워낙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안 난다. ‘세금은 본인 부담이 아니다’라고 쓴 것도 기억에 없다”며 모르쇠로 일관했다.
반면 S 씨는 주식 양수금 4억 원과 유상증자금 5억 원을 대우 측에서 받았다는 사실과 주식 포기각서를 그룹 기조실에서 요구해 작성한 사실은 인정했다. 하지만 그도 “1년 뒤에 퇴직금과 공로주식, 과수원 매매 자금으로 모두 갚았다”고 주장했다. 돈을 갚은 증거를 묻자 “퇴직금과 공로주식은 대우 내부에서 일괄 처리했기 때문에 모른다. 정 알고 싶으면 김우중 전 회장에게 직접 물어보라”고 목청을 높였다.
그의 주장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9억 원의 출처를 김우중 전 회장의 개인 계좌로 믿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는 D사를 둘러싼 돈 거래는 자신과 김 전 회장 간의 개인 채권ㆍ채무 관계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결국 D사의 진짜 소유주를 둘러싼 진실공방은 서류상으로 남아 있는 9억 원의 출처와 귀착지로 좁혀진다. 전 대우 기조실 임직원들의 주장대로라면 D사의 인수자금은 김우중 전 회장 내지는 대우 법인에서 나온 것이다. 반면 S 씨는 9억 원을 김 전 회장에게 잠깐 빌린 건 사실이지만 이미 채무를 변제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위장계열사를 관리했던 K 씨는 이에 대해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내가 돈 전달이나 포기각서 작성 등 D사의 실질적인 관리를 했는데 S 씨가 채무를 변제했다면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러나 S 씨의 반박 또한 만만치 않다. “K 씨가 나를 모함하는 것이다. 채무를 변제한 뒤 포기각서를 내놓으라고 하니깐 이미 없앴다고 했는데 이제 와서 서류들이 돌아다니는 이유를 모르겠다. 정 의심 가면 김 전 회장에게 물어보라. 나는 법적 대응을 할 준비가 다 돼 있다. 그런데도 예보에서는 소송을 걸지 않는다. 김 전 회장이나 대우 것이라면 왜 못 거나.”
하지만 여전히 석연찮은 부분이 남아 있다. 바로 공장 설비 비용은 어떻게 조달했느냐는 것. S 씨는 이에 대해 “대우차에서 전세금 명목으로 미리 지급한 10억 원과 은행 빚으로 채웠다”고 말했다. 하지만 D사 부동산 등기부등본 확인 결과 93년 직후에 은행에서 돈을 빌린 적이 없었다. S 씨는 이를 재차 묻자 “오래된 일이라 잘 기억이 안 난다”며 말끝을 흐렸다.
대우는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뿔뿔이 흩어진 계열사만이 대우라는 간판을 달고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한때 세계를 호령했던 김우중 전 회장과 대우그룹. 하지만 그룹 붕괴 이후 위장계열사와 관련된 소송이나 논란은 보는 이를 씁쓸케 한다. 과연 D사를 둘러싼 공방의 진실이 ‘대우 전 임원의 심각한 모럴 해저드’인지 ‘일부의 모함’인지는 현재로선 알 길이 없다. 진실의 열쇠는 그저 진실을 아는 자만의 몫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안형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