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화차>에서처럼 자신의 인생이력을 모두 거짓으로 꾸며 결혼생활을 하고 사기행각을 벌인 여성이 경찰에 구속됐다. 사진은 영화 속 장면과 포스터.
옷을 사주겠다며 A 씨를 이끌고 간 곳은 백화점의 명품관. 더 놀랐던 것은 아내가 명품관 직원들이라면 누구나 알아보는 VIP였다는 점이다. 한 벌에 300만 원이 넘는 양복을 거침없이 사서 안겼다. 대기업을 다니는 월급쟁이였던 자신이 꿈도 꾸지 못했던 호사였다. 그렇다고 박 씨가 허세를 부리거나 사치스럽게 하고 다니는 타입도 아니었다. 정작 자신은 그 흔한 명품가방 하나 들고 다니지 않았다. 그저 소박하고 단정한 서류가방 하나를 들고 매일 병원으로 출퇴근했다.
집에서도 일 생각만 했을 만큼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쓰던 다이어리에는 A 씨가 알아보지 못하는 의학전문용어가 영어로 적혀 있었다. 자신이 쓴 논문이 해외 유명 학술지에 올라가기도 했었다는 얘기도 했다. 일과 집밖에 모르는 그녀가 A 씨는 더 없이 믿음직했다.
주변 사람들은 박 씨를 “천사 같았다”고 기억했다. 가사도우미 아주머니들과는 격의 없이 지내곤 했다. 경조사 때마다 안부를 묻고 선물을 주는가 하면, 아주머니의 아이들까지도 살뜰히 챙겼다. 인사치레만 하는 게 아니라 수백만 원씩 하는 명품 점퍼, 티셔츠 등을 선물했을 정도였다. 지인 중에 병원에 가야 할 일이 생겨도 “병원에 말해서 진료시간을 당겨주겠다”며 일일이 챙겼다.
부부에게도 남들 다 있는 불행 한 가지쯤은 있었다. 남편 A 씨가 박 씨의 부모님과 종교문제로 갈등을 빚었던 것. 결혼 초 박 씨의 부모님은 “사돈내외가 절에 불공을 드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위한테 붙은 귀신 때문에 나쁜 일이 생긴다”는 등의 말을 했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었던 A 씨에게 처가의 이런 요구는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었다. 아내는 펑펑 울며 “제발 그만 하시라”고 ‘부모님’(나중에 가짜 부모로 밝혀짐)을 설득하기도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결국 결혼생활 내내 부부는 처가와 연락을 끊고 지냈다.
미심쩍은 점이 없었던 건 아니다. 딸의 돌잔치 날 A 씨는 한 친구에게 이상한 얘기를 듣는다. “건물 밖에서 어떤 사람이 사람들을 모아놓고 무언가 지시하는 모습을 봤는데, 거기 있던 사람들이 돌잔치 하객으로 앉아있다”고 친구가 말했다. 당시 A 씨는 “좋은 날 별 소리를 다 한다”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로부터 다시 1년여 뒤. A 씨는 서초경찰서 경제범죄 수사2팀으로부터 출석요청을 받는다. 자신의 누나가 박 씨와 A 씨를 고소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경찰은 “박 씨가 시누이로부터 돈을 5억 원 넘게 빌려놓고 갚지 않아 고소장이 접수됐다”고 설명했다. 알고 보니 박 씨는 시누이에게 “곧 돌려주겠다”며 2700만 원을 빌린 것을 시작으로, 채권투자 명목으로 2억 원을 빌리는 등 33번에 걸쳐 5억 2000만 원을 받아썼다. 시누이가 의심을 살까 우려해 다른 사람에게 빌린 돈으로 ‘돌려막기’까지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박 씨와 3년여 결혼생활을 한 남편은 그녀의 정체를 눈치채지 못했다. 사진은 영화 속 장면.
박 씨가 집을 나간 것도 이쯤이었다. 자살을 암시하는 마지막 문자를 끝으로 박 씨는 딸을 안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휴대전화는 착신정지 상태였고, 친구라고 소개했던 사람들은 모두 연락이 끊긴 지 오래였다. 그사이 빚 독촉은 계속 이어졌다. 집에서 일하던 가사도우미 아주머니와 지인 몇 사람이 찾아와 박 씨를 찾았다. 누군가는 “전세를 월세로 돌려가며 마련한 돈”이라고 하소연했고, 또 다른 사람은 “아들이 아르바이트 해서 모은 돈”이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사치라곤 몰랐던 아내가 그 많은 돈을 어디에 써버렸는지 A 씨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의 비극은 시작에 불과했다. 장인 명의로 돼 있는 신혼집을 정리하려 나간 부동산에는 난생 처음 본 중년의 여성이 자신이 집주인이라며 앉아있었다. 알고 보니 그녀가 진짜 장모였던 것. 지난 3년 넘게 박 씨가 그에게 보여줬던 ‘부모님’은 역할대행 업체에서 소개받은 대역이었다. 뿐만 아니라 결혼식과 돌잔치에 왔던 지인들도 가짜였다. 결혼 초 부모님과의 갈등은 모두 박 씨가 꾸며낸 연극이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매일 아침 출근했던 모 대학병원 산부인과 의사 명단엔 박 씨의 이름이 없었다. 박 씨가 입고 다니던 의사 가운도, 패용했던 사원증도 모두 감쪽같이 위조된 것이었다. 심지어 의대를 졸업한 것도 아니었다. 그녀가 얘기했던 유학경험도, 유명 연구기관에 다닌 경력도 없었다. 그녀의 이력 중 유일하게 사실이었던 건 서울시내 모 대학원(의학 관련)에 다녔던 일이 전부다. 그마저도 박 씨가 동기를 상대로 돈을 빌렸다가 갚지 않아 사기죄로 고소당하면서 제적됐다. A 씨가 철석같이 믿고 있던 그녀의 모든 인생이력이 전부 다 거짓이었던 셈이다.
수사를 맡았던 서초경찰서 관계자는 “수배령을 내려 숨어 다니던 박 씨를 붙잡아 두 건의 사기혐의를 조사했다. 집을 나간 후 출산을 했는지 아이 둘을 데리고 왔었다”고 말했다. 피해자들의 고소로 박 씨는 지난 3월 초와 5월 말 조사를 받았으나 아이를 부양해야 하는 점을 참작해 불구속 기소에 그쳤다. 그러나 박 씨는 기소된 3월 이후에도 사기행각을 이어왔던 것으로 밝혀졌다. 3월 말 또 다른 지인을 상대로 “병원에 육아 휴직을 내고 쉬고 있다. 남편은 재벌가 직계 가족인데 해외출장을 떠났다”며 “돈을 빌려주면 채권에 투자해주겠다”고 말하며 2억 원을 가로챘다.
잇따른 사기행각에 박 씨는 결국 구속됐다. 구속 직후 박 씨는 법원에 반성문을 제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건을 맡은 서울중앙지검 형사8부 관계자는 “앞서 저지른 사기 사건에 대한 합의금을 구하고,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재판이 진행 중인 사안이라 그밖에 자세한 정보는 공개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서윤심 기자 heart@ilyo.co.kr
‘한국판 화차’ 또 있다 부산 ‘시신 없는 살인사건’ 오버랩 마음속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세계를 살고 있다고 믿으며 현실을 부정하는 반사회적 인격 장애. ‘리플리증후군’의 증상이다. 이런 증상이 과도하게 나타나면 절도, 사기, 살인 등의 범죄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한국판 화차녀’ 박 씨가 리플리 증후군을 겪고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자신이 상류층이라고 믿고 있지 않다면 이렇게 치밀하게 각본을 짜기 어렵다는 것도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세월호 사건 당시에도 자신을 민간 잠수부라고 소개한 C 씨가 “현장 정부 관계자가 대충 시간이나 때우고 가라고 했다”고 말해 물의를 일으킨 바 있다. C 씨는 잠수 자격증도 없는 일반인으로 밝혀졌다. 누리꾼들은 이 여성이 “과거 걸그룹의 사촌언니 행세를 한 적이 있다”, “유명 프로야구 선수의 애인 행세를 했다”는 등의 의혹을 제기하며 C씨가 끊임없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현역 장교 행세를 하며 여성들을 상대로 사기행각을 벌인 남성도 있었다. 교도소 출소 후 변변한 직업이 없던 D 씨는 남대문 시장에서 계급장이 달린 군복, 군화, 장교 신분증 등을 마련했다. 수사망을 피하기 위해 대포폰까지 마련하는 치밀함도 보였다.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여성들을 상대로 약 8000만 원 상당을 가로채 다시 징역을 살게 됐다. [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