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의 잇단 사업 재편으로 후계 승계 작업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서현 제일모직 사장과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왼쪽부터)이 ‘2012 호암상 시상식’에 참석한 모습.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지난 5월 10일 밤, 이건희 회장이 쓰러졌다. 그리고 100일이 흘렀다. 이 회장 치료를 맡고 있는 삼성서울병원 의료진에 따르면 이 회장의 상태가 좋아지고 있고 갈수록 호전될 것이라고 하지만 100일이 넘도록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이 회장의 의식이 100일 전 그때 그 상태라면, 삼성그룹의 사업구조는 100일 전과 크게 차이가 난다. 올해 안에 삼성SDS와 삼성에버랜드 상장이 예정돼 있는 데다 사업구조의 추가 개편 가능성도 열려 있다. 지금까지 삼성 후계구도의 윤곽을 잡았다면, 앞으로는 이것이 뚜렷해질 전망이다.
삼성의 사업 재편이 시작된 것은 1년 전인 지난해 9월이다. 그룹 지주사 역할을 하는 삼성에버랜드가 9월 23일 제일모직 패션사업부문을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나흘 뒤, 삼성SDS가 삼성SNS를 흡수·합병한다고 밝히면서 사업 재편과 함께 그룹 후계 작업에 시동을 건 것으로 해석됐다. 삼성SDS와 삼성SNS의 합병·증시 상장으로 이재용 부회장에게 잔뜩 힘이 실렸다.
지난 3월 31일 삼성SDI와 제일모직의 합병이 발표되면서 사업 재편과 후계 작업이 본격화됐다. 4월 2일에는 삼성종합화학과 삼성석유화학의 합병이 발표됐고 5월 8일에는 올해 안에 삼성SDS의 증시 상장을 공식화했다. 이틀 뒤 이건희 회장이 쓰러졌다. 이후에도 삼성에버랜드의 증시 상장, 삼성에버랜드의 제일모직으로 사명 변경에 이어 지난 1일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의 합병이 발표됐다.
지난 1년간 숨 가쁘게 달려온 삼성 사업 재편은 후계 승계 작업으로 해석됐다. 그동안 ‘설’로만 나돌던 일들이 현실화되고 삼성에서 부인해왔던 일들이 급하게 처리되자 이건희 회장의 복귀가 힘들어진 것 아니냐는 관측이 적지 않다. 이재용 부회장의 대외활동도 부쩍 늘었다. 재계 고위 인사는 “이 회장의 의식이 들어온다 해도 경영에 복귀하기는 힘들다고 판단한 것 아니겠느냐”면서 “중공업과 엔지니어링의 합병으로 승계 작업의 큰 그림은 얼추 그린 듯하다”고 말했다.
재계에서는 당초 이재용 부회장이 전자·금융을, 이부진 사장이 건설·중화학·유통을, 이서현 사장이 패션·미디어를 각각 나눠 가질 것으로 예상했다. 공교롭게도 그동안 삼성의 사업 재편 과정도 여기에 맞춰 진행돼 왔다. 그러나 삼성엔지니어링이 삼성물산이 아닌, 삼성중공업과 합병하기로 함으로써 이 같은 구도에 변화가 생겼다.
지난해 7월부터 삼성물산은 삼성엔지니어링 지분을 꾸준히 매입하기 시작, 지난해 말에는 7.81%까지 지분율을 끌어올리면서 제일모직(13.10%)에 이어 2대주주에 올라섰다. 이 때문에 삼성물산과 합병설이 계속 맴돌았으며 합병 후 건설부문은 이부진 사장이 맡을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다. 하지만 삼성물산이 아닌 삼성중공업과 합병을 결정하자 건설부문의 향배가 모호해졌다. 재계 관계자는 “선대회장이 후계자인 이건희 회장에게 그룹의 주요 계열사들을 전부 맡기고 딸들에게는 상대적으로 작은 부문을 맡긴 것처럼 이건희 회장 역시 외아들 이 부회장에게 대부분 사업을 맡기는 것 같다”고 진단했다.
삼성 관계자는 “모든 합병과 상장 등은 시너지 효과를 위해서지 계열분리와 관계없다”면서 “하나의 삼성이라는 큰 틀에서 각자 전문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삼성 쪽 얘기와 달리 재계·증권가에서는 지난 1년간 삼성이 진행해온 합병, 사명 변경, 증시 상장 계획 등을 승계 작업과 연관시키고 있다.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 합병 발표 후 이튿날인 지난 2일 증권가에선 두 회사의 합병 시너지 효과를 낮게 보며 후계 승계 작업에 초점을 맞추었다.
성기종 대우증권 연구원은 “이건희 회장의 경영 복귀가 사실상 어려워 승계 작업에 속도를 내는 차원으로 해석된다”며 “이번 합병은 경영권 승계 작업의 목적이 더 클 것”이라고 지적했다. 앞서의 재계 고위 인사도 “후계 구도가 얼추 마무리된 듯하다”며 “앞으로는 전자 위주의 비금융과 생명 위주의 금융으로 지배구조를 단순화하는 일이 잦아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대략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삼성 후계 구도에 따른 사업적 기상도를 보면 이재용 부회장은 ‘흐림’, 이부진 사장은 ‘화창’, 이서현 사장은 ‘구름’으로 표현된다. 공교롭게도 이 부회장이 맡을 것으로 예상되는 전자·생명은 모두 실적과 주가가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스마트폰 실적 부진으로 삼성전자의 영업이익이 줄어들고 있고 삼성생명 역시 구조조정을 할 만큼 상황이 좋지 않다.
반면 이부진 사장의 호텔신라에 대한 전문가들의 전망은 장밋빛이다. 이 사장의 면세점 사업 확장에도 후한 점수를 주고 있다. 덕분에 호텔신라 주가는 연초 대비 두 배가량 상승했다. 패션·미디어를 맡을 것으로 보이는 이서현 사장의 경우 아직까지 마땅히 두드러지는 사안은 없다. 다만 남편 김재열 사장이 맡고 있는 삼성엔지니어링이 삼성중공업과 합병해 오빠인 이재용 부회장에게 가는 것이 못내 아쉬울 것으로 보인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