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7월 24일 인도네시아 유도요노 대통령 환영식장에서 아프간 피랍사태를 논의하고 있는 송민순 외교통상부 장관(가운데)과 문재인 비서실장(왼쪽), 백종천 안보실장. 청와대사진기자단 | ||
하지만 탈레반 측이 여성 인질2명의 우선 석방 문제를 두고 내부 갈등을 빛었던 것으로 알려지는등 앞으로 협상과정에서 또 다른 변수가 불거질 가능성도 아직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향후 탈레반과의 협상 결과가 주목되고 있는 가운데 국내 외교 안보 및 테러 전문가 집단 사이에서는 정부의 대테러 대응 인식과 협상 전략에 대한 문제점이 다시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지난 2004년 김선일 씨 살해 사건 이후 국제 테러에 대한 적절한 대응의 중요성에 관한 논의가 정부 차원에서 활발히 이뤄졌지만 허술하고 미봉적인 테러 대응의 문제점이 실질적으로 개선되지 못했고, 이러한 부분이 이번 피랍 사태 전반에 걸쳐 상당한 걸림돌로 작용했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적잖다.
이 연장선상에서 <일요신문>은 지난 8일 한 저명한 테러 전문가와 만났다. 이 전문가는 실명을 밝히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정부의 대테러 대응 실상 및 이번 피랍 사태 초기에 나타난 협상 능력의 문제점 등에 대해 날카롭게 지적했다.
―이번 사태로 한국인들이 테러 조직의 직접적인 목표였음이 드러났다.
▲90년대 이후 이번 아프가니스탄 한국인 납치 사건을 포함해 약 30여건의 테러 사건에 우리 국민들이 직· 간접적으로 관여됐다. 지난 2002년 인도네시아 발리 테러 사건 때까지만 해도 한국인이 테러의 타깃이었다기보다는 불행하게도 그 장소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화를 입은 측면이 강했다. 그러나 9·11테러 이후 알카에다의 2인자인 알자와리가 직접 한국을 두 번째 테러 선호 대상으로 지목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최근 주요 테러 조직들이 활동하는 국가에서는 한국인을 납치해 탈레반이나 알카에다에게 넘겨주면 한 명당 7000달러를 받는다는 말이 나돌고 있다. 말 그대로 한국사람 납치하면 팔자 고치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이번 피랍 사건의 경우도 직접 탈레반이 납치를 자행했을 수도 있지만 그야말로 떼강도와 유사한 세력들이 버스에 탑승한 한국인을 납치해 탈레반에 넘겼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테러가 빈번한 국가 혹은 테러 조직에 대한 정부의 관리 소홀 문제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는데.
▲한국민이 최초로 국제 테러 조직의 타깃이 된 김선일 씨 사건이 벌어질 당시 정부는 다시는 이러한 비극적인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모든 대처 방안을 강구하겠다고 했는데 결국 이 말은 ‘립서비스’에 그치고 말았다는 점을 일단 말해두고 싶다.
이번 사태가 벌어지자 정부는 아프가니스탄을 ‘여행제한국’으로 미리 지정했었다고 했는데 그것이 모든 책임을 면하게 할 사유가 될 수 없다고 본다. 분명 정부는 국민들에 대한 대테러 정보 제공에 근본적으로 실패한 책임이 있다. 한 예를 들어보자. 외교통상부 웹사이트에 들어가면 메인 화면도 아닌 해외 안전 사이트를 먼저 클릭한 뒤 한참을 이리저리 찾아야 여행 유의·제한·금지국 등을 파악할 수 있다. 접근성이 떨어지는데 과연 해외로 나가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얼마나 이 사이트를 활용했는지 의문스럽다.
▲ 지난 10일 송민순 장관이 가봉 핑 외교장관(가운데)을 만나 아프간 피랍자 석방을 위한 협조를 부탁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당연히 위험 지역에서 활동을 하거나 테러 조직에 납치됐을 시 필요한 행동 요령에 관한 정보는 더 더욱 찾을 수 없다. △아프가니스탄 지역 등에서는 육상으로 이동해서는 안 되고 △기독교를 신봉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행동, 특히 ‘아멘’ 소리를 하지 않아야 하고 △특수한 신분(군인, 경찰 등 신분증이나 태권도 단증, 교인 신분증 소지자도 살해 대상 1순위)을 드러내지 말아야 하며 △제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 첨부된 일반 신분증도 소지해서는 안 된다는 식의 구체적인 정보는 눈 씻고서도 찾아볼 수 없다.
―정부의 대테러 대응 활동이 너무 형식적이지 않느냐는 지적도 있는데.
▲정부의 대테러 대응 체계는 대통령 훈령 제47호, 일명 국가 대테러활동지침에 근거한다. 중요한 것은 법적 근거가 있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훈령이라는 점이다. 테러 사안이 있을 시 해당 각 부처 협조를 요구할 수 있는 행정 명령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법률적 근거가 없는 것은 사실상 불법이다. 그러다 보니까 대테러 정책 결정 기구도 만들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정책 결정 기구가 없으니 실무 기구도 없다. 형식적으로 정부 테러대책위원회가 있는데 이것도 일종의 편법이다. 자원도 없고 더욱이 대테러 예산도 없다. 대신 정보비라는 항목에서 예산을 확보해 쓰고 있을 뿐이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테러 조직에 대한 정보 및 협상 전문가의 부재 문제, 중동 국가들과의 외교 채널 가동상의 문제도 드러났는데.
▲현재 외교부 1차관을 중심으로 한 현지 정부 대책반이 파견된 상태인데 아이러니한 것은 대책반에 협상 전문가를 포함시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탈레반은 무수한 납치, 인질 사건을 통해 협상의 노하우를 가진 전문가 집단이다. 아프가니스탄과 미국이 있다고는 하나 직접 협상에 나서는 우리는 협상의 초보자다. 한·미 FTA 협상하는 것처럼 예상 가능한 의제를 가지고 논의하는 여유로운 상황이 못 된다. (탈레반은) 목숨을 담보로 일방적으로 요구 조건을 제시하고 협상이 깨지면 극단의 선택을 하는 조직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책반이 이번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핵심 전략을 꿰뚫고 현지로 날아갔는지 걱정스럽다.
실시간으로 사실 관계를 확인하지 못하는 정보력의 부재, 다각적인 외교력이 동원되지 못한 부분도 아쉽다. 이번 피랍 사건의 해결의 키를 쥔 당사국은 아프카니스탄과 미국이지만 초기 대응 당시, 지난 96년과 2001년 사이 탈레반 정부를 인정했던 파키스탄과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UAE) 등을 포함한 이슬람국가들로 하여금 압박을 가할 수 있는 외교 채널의 가동이 필요했다.
―정부가 아프가니스탄과 미국의 입장 변화를 너무 기대한 게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미국은 포드에서 카터 대통령으로 넘어오면서 대테러 정책을 강화했다. 결정적으로 미국의 대터러 정책의 근간이 초강경 입장으로 선회한 것은 지난 1979년 이란 이슬람 과격파에 의한 미국대사관 점거 및 인질 사건 때문이다. 이때부터 미국은 공식적으로 △절대 테러 조직에 양보하지 않고 △테러 조직은 법의 정의 앞에 끝까지 추적해서 심판하며 △테러 지원국은 정치·경제적으로 제재조치를 취하고 △동맹국들에게는 대테러 대응 시스템과 프로그램을 지원한다는 기조를 확고히 했다.
▲ 무장한 파키스탄 탈레반. 최근 아프간 국민들이 인질 석방 목소리를 높이는 등 대내외적으로 탈레반을 압박하고 있다. AP/연합 | ||
―정부는 물론 정치권에서도 이번 사태 해결에 나서고 있다. 협상의 전략적인 차원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협상은 은밀함이 요구된다. 각당 원내대표로 구성된 국회의원 대표단이 사태 해결을 위해 미국에 건너가면서 국내 언론들이 이를 비중 있게 보도했는데 이러한 부분을 과연 미국이 좋아했겠냐는 생각을 해봐야 한다. 미국은 확고하다. 대표단이 랜토스 미 하원 외교위원장을 만나 협조를 요청하니까 친손자가 탈레반에 잡혀 있어도 협상 안한다고 했더라. 그게 미국의 입장이다. 미국의 입장을 우리가 공식적으로 재확인해준 셈이다.
정부의 협상도 아쉬운 부분이 있다. 처음부터 철군이라는 우리의 패를 너무 빨리 보여준 점은 전략 차원에서 한 번쯤 짚고 넘어갈 대목이다. 지금 우리가 적절하게 쓸 수 있는 카드가 없지 않은가.
―탈레반과의 협상에서 중점을 둬야 할 부분은 뭐라고 보는가.
▲협상 테이블에 ‘다자’가 앉게 되면 합의 도출이 어려워진다. 가장 심플하게 양자 간, 그러니까 ‘탈레반과 대한민국의 문제다’라는 것을 탈레반 측에 인지시켜야 한다. 단순화시키는 게 중요하다.
그 다음 탈레반 측이 인질 석방의 선결 조건으로 내세우고 있는 탈레반 수감자 석방은 한국 정부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고 또한 한국 정부를 압박한다고 해서 미국이 도와줄 일이 아니라는 점을 설득시켜야 한다. 대신 한국 정부가 수용할 수 있는 요구 조건을 그들로부터 이끌어내야 한다.
수감자 석방을 유도하는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카르자이 정부에 수감자들을 석방하되 ‘맞교환’이 아닌 ‘수감자 일부 사면’ 형식으로 하자는 쪽으로 설득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명분도 서고 아프가니스탄의 국민통합에도 도움되는 게 아니냐는 식으로 접근할 수도 있다. 대신 반대급부로 우리 정부로서는 경제적인 원조 등을 협상 조건으로 제시할 수 있다.
장기적인 인내가 요구되는 시점이다. 사실 탈레반도 대외적으로 압박을 받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이 인질 석방 목소리를 높이고 있고 인근 이슬람국가에서도 코란 율법을 들며 탈레반 측을 압박하고 있지 않은가.
탈레반은 단순한 일개 무장조직이 아닌 카르자위 정권과 경쟁하려는 정치 세력으로 인정받고 싶어 한다. 그들로서도 국제사회가 조직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는 점을 부담스러워 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다.
유재영 기자 elegan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