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왼쪽)과 이수영 OCI 회장 등 재벌 총수들을 포함한 자산가들이 외화 밀반입 혐의로 금감원의 조사를 받고 있다.
지난 22일 금융감독원 고위 관계자는 “해외에서 100만 달러 이상 증여성 자금을 당국에 신고하지 않고 들여온 자산가들을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증여성 자금이란 수출입 등 정당한 거래의 대가가 아닌 무상으로 주고받은 돈을 뜻한다. 금융당국에 따르면 이러한 증여성 자금을 국내에 반입할 경우 사전에 반드시 신고해야 한다. 만약 신고를 하지 않는다면 외국환거래법 위반에 해당해 처벌 대상이 될 수 있다.
금감원이 지목한 자산가는 20여 명이다. 이들이 국내에 들여온 외화만 해도 총 ‘5000만 달러’(한화 약 522억 원)에 달하는 막대한 규모로 파악된다. 주목할 만한 점은 여기에 재벌 총수들이 대거 연루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에 금감원의 레이더망에 누가 걸려들었는지 재계의 관심은 더욱 쏠릴 수밖에 없었다.
현재 재벌총수들은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 이수영 OCI 회장, 황인찬 대아그룹 회장, 김호연 빙그레 회장의 딸, 이승관 경신 사장 등이 명단에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들은 적게는 100만 달러에서 200만 달러, 많게는 900만 달러까지 외화를 신고 없이 반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격호 회장의 경우 지난 2012년, ‘900만 달러’를 국내로 송금 받은 사실이 포착돼 조사대상에 올랐다. 적발된 재벌총수 중 가장 많은 외화를 들여온 신 회장이기에 자금의 출처와 용도에 갖가지 의문이 제기됐다.
이에 롯데그룹은 즉각 입장 해명에 나섰다. 신 회장이 송금 받은 자금은 전액 세금을 내는 데 사용했기 때문에 불법 외화반입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롯데그룹 관계자는 “신격호 회장이 1970년대부터 한국에 대규모 투자를 진행했으며 당시 일본롯데를 통해 로베스트AG사를 설립해 여수석유화학(현 롯데케미칼의 지주회사)에 투자했다”며 “이후 여수석유화학과 롯데물산이 합병하면서 로베스트AG 소유의 주식 일부를 매각했고, 여기에서 발생한 세금을 내기 위해 자금을 송금 받은 것”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금감원 측은 “세금으로 송금한 자금에 대해선 신고하지 않아도 되지만, 해당 자금이 세금으로 납부되기 전에 발생한 거래는 증여에 해당하는 이전거래로 해석할 수 있다”며 팽팽하게 맞서는 중이다.
이수영 OCI 회장의 경우 지난해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페이퍼컴퍼니를 세워 외화자금을 보유했다는 의혹으로 금융당국의 조사를 받은 바 있어 이번 외화 밀반입 조사에 더욱 촉각을 곤두세우는 모습이다. OCI 측은 금감원 발표 이후 즉각 “이수영 회장이 국내로 들여온 100만 달러 규모의 자금은 절차를 거쳐 국내로 회수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OCI 관계자는 “자금의 성격은 증여성이 아니라 이수영 회장이 2006년부터 2008년까지 OCI 미국 자회사인 OCI 엔터프라이즈 이사회 의장으로 재직하면서 받은 보수”라며 “지난해 문제 제기 된 해외 계좌를 폐쇄하면서 그 계좌에 있던 돈도 국내로 들어왔다. 법적 문제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밝혔다.
해외에서 부동산을 매매한 자금을 국내로 들여온 경우도 포착됐다. 김호연 빙그레 회장의 딸은 어머니로부터 하와이에 있는 콘도를 물려받았다. 해당 콘도는 부자들이 밀집해 있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도 최고급으로 알려진 호쿠아 콘도로 알려져 있다. 김 회장의 딸은 올해 초 콘도를 190만 달러를 받고 팔았고 이중 130만 달러를 지난 6월 국내로 들여온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밖에 100만 달러가량을 국내로 들여온 황인찬 대아그룹 회장은 “중국 지인에게 사업상 도움을 주고 무상으로 증여 받았다”고 당국에 소명했고, 이승관 경신 사장은 “해외 예금계좌에서 인출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금감원 관계자는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현재 (재벌총수들의) 소명 자료를 바탕으로 검증 조사가 진행 중”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재계 일각에서는 이러한 금감원의 조사 의지에 불만의 목소리도 높다. 국부 유출도 아니고 외화 반입 과정에서 절차상의 실수에 대해 당국이 지나친 조사를 벌인다는 지적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금융당국이 KB사태로 여론의 질타를 받자 국면 전환용으로 유명 대기업 조사 카드를 꺼낸 것”이라고 의심의 눈길을 보내기도 했다. 지난 5월 KB국민은행의 주전산 시스템 교체와 관련해 촉발된 KB사태는 KB금융그룹 수뇌부의 내분과 리베이트, 외압 의혹 등이 겹치면서 금융계 ‘복마전’을 방불케 한다는 평가를 얻었다. 여기에 금융당국의 허술한 대처와 오락가락한 징계수위로 인해 비판 여론은 더욱 거세게 일어났다. 때문에 위기에 빠진 금감원이 ‘재벌총수들의 외화 밀반입’이라는 눈길이 쏠리는 구호로 국면을 전환하고 있다는 시각이 금융계에 파다한 것이다.
최근 정부가 재벌총수 사면 가능성을 꺼내듦에 따라 금감원의 외화 밀반입 재벌총수 조사가 어떤 영향을 받을지도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그동안 자신 있게 내세운 ‘재벌총수 무관용’ 원칙을 정부 스스로 무너뜨리는 행보인 만큼, 금감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현재까지 금감원은 계속해서 조사를 진행한다는 입장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현재 (외화 밀반입) 명단은 2011년부터 2014년까지 외환거래전산망에 기록된 100만 달러 이상의 거래내역 중 임의로 진행된 샘플조사에서 발견됐다”며 “조사를 확대할 가능성을 검토해보고 있다”라고 전했다. 금감원은 불법 사실이 확인되면 검찰에 고발할 계획이라고 전해져 향후 재벌총수들이 얼마큼 연루될지 조사 결과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박정환 기자 kulkin85@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