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업체 혹은 경쟁 국가의 기술정보는 정보 중에서도 최고급 정보다. 경쟁에서 한 발 앞서나가는 기업의 정보를 얻어낸다면 순식간에 기술격차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치가 있는 것은 갖기도 어려운 법. 때로는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하기도 한다. 이 중심에 산업스파이가 있다. 헤드헌팅 업체 직원을 빙자한 전문적인 산업스파이들이 있는가하면 때로는 내 옆의 동료가 산업스파이로 돌변하기도 한다. 처음부터 기술을 유출하려는 의도는 없었지만 보안의 중요성을 망각한 채 한순간의 실수로 산업스파이가 되는 경우다.
일부 영화에서 그려지는 것처럼 스파이 활동은 낭만적이지 못하다. 오히려 국가와 기업을 좀먹는 21세기판 매국노에 가깝다. 한순간의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산업기술을 넘겨 버려 국가를 병들게 하는 산업스파이들의 활동을 추적해봤다.
사례1 ‘100일 작전.’
국내 모 컨설팅업체가 K 자동차의 기술을 빼내 중국의 한 자동차 업체에 팔아넘기기 위한 작전명이었다. 지난해 2월 컨설팅업체 직원 Y 씨는 기술을 빼내기 위해 K 자동차 생산직 직원이었던 후배 L 씨에게 접근했다. Y 씨는 K 사에서 개발하고 있는 차체조립기술 및 영업비밀 자료를 넘겨주면 큰돈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L 씨는 자신이 평소 만질 수 없던 돈을 미끼로 유혹해오자 이를 거절할 수 없었다. L 씨는 사내에 있는 컴퓨터에서 휴대용저장장치로 기술을 빼내 사외로 가져나온 후 이를 이메일을 이용해 컨설팅업체 직원들에게 넘겼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잡히게 마련. L 씨의 수상한 행동들이 국가정보원 산업기밀보호센터에 포착됐다. 당시 국정원은 한국의 자동차 생산기술이 중국으로 유출되고 있다는 첩보를 접수하고 관련업체들의 기술 동향을 주시하던 중이었다. 국정원은 당장 특별 전담반을 구성하고 3개월에 걸쳐 이 컨설팅업체와 L 씨의 행동을 관찰했다.
3개월간의 관찰 결과 이들은 K 사의 25년간의 노하우가 축적된 ‘신차 품질보증시스템’과 ‘금형공장 설비배치도’ 및 ‘신차개발일정’ 등 그야말로 핵심기술 57건을 중국의 자동차 회사에 유출을 시도했다. 이들은 중국자동차 회사에 3개월을 머물며 이 기술 중 일부를 넘겼다. 상당한 기술을 손에 넣은 Y 씨는 이를 넘겨주는 조건으로 중국의 다른 자동차 회사 이사로 취업하기로 하고 중국으로 출국할 예정이었으나 출국 전날 검찰에 검거됐다.
사례2 지난 2006년 4월 국내 IT업체 P 사의 미국 연구소 연구실장인 K 씨는 회사 인사에서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 핵심요직에 있던 자신을 돌연 ‘한직’이나 다름없는 곳으로 발령을 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일해왔던 회사가 자신을 내쳤다고 생각한 K 씨는 회사에 앙심을 품기 시작했다. 복수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방법을 찾다가 결국 회사의 기밀을 유출하는 방법으로 앙갚음 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는 회사에서 함께 근무했던 모뎀개발 그룹장 J 씨에게 ‘기술을 빼내 큰돈을 벌자’고 제안했고 둘은 함께 거사(?)를 도모할 다른 사람들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팀이 꾸려진 후 J 씨 등은 10월부터 3개월에 걸쳐 P 사의 핵심기술이었던 와이브로 기술과 각종 정보들을 노트북과 외장형 하드디스크에 옮겨 저장했다. 그리고 2007년 1월부터 3월까지 범행에 가담한 사람들이 순차적으로 회사를 그만뒀다. 이후 이들은 K 씨가 미국 실리콘밸리에 P 사 몰래 설립한 인터넷 기술업체의 한국지사로 자리를 옮겼다. K 씨도 이들이 모두 그만둔 후 해고됐다. J 씨는 한국지사로 자리를 옮긴 후 평소 안면이 있던 P 사의 핵심연구원들과 접촉해 스톡옵션 등을 제시하면서 입사를 제의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판이었다. 국가 핵심기술 유출에 대비한 정보 수집 중이던 국정원은 핵심 연구원들이 순차적으로 그만둔다는 사실을 이상히 여겨 이들의 행동을 지켜보며 기술 유출이 있었는지에 대한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 자료:국정원 | ||
위의 두 사례는 산업스파이들이 어떤 식으로 활동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먼저 산업스파이들은 L 씨의 경우처럼 어떤 식으로든 내부조직에 깊이 연관되어 있다. 이 같은 사실은 적발된 산업스파이의 86%가 전·현직 임원들이라는 국정원의 내부자료를 보면 잘 나타난다. 또한 예전처럼 혼자 범행을 계획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대부분 팀 단위로 움직인다. 위의 경우도 총 9명이 기술유출에 가담했다. 기업의 보안이 철저해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범행규모가 커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들은 적어도 3개월에서 많게는 1년 이상의 기간을 두고 범행을 저지른다. 기술유출을 시도하다 국정원 측에 적발된 모 일당은 몇 주 혹은 몇 개월 단위로 순차적으로 회사를 그만두며 기술을 빼내다 꼬리가 밟혔다.
최근 들어서는 전문적인 브로커도 활개를 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브로커들은 헤드헌팅업체 혹은 컨설팅 업체라며 기업 연구원들에게 접근해 은밀한 제의(?)를 한다. 국내 조선업계나 IT업계, 자동차 업계에서 일하는 대기업 연구원들이라면 한번쯤은 이런 브로커들의 제의를 받는다고 한다. 우연히 기술유출 제의를 받고 산업스파이 활동을 하다 국정원에 적발된 후 ‘내가 산업스파이가 될 줄 몰랐다’고 한탄한 이들이 적지 않다는 것은 이런 유혹에 얼마나 쉽게 노출되어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소수의 경우이긴 하지만 개인적인 앙심을 갖고 일종의 보복행위를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인사에서 밀려났거나 다른 이유로 해고된 후 다니던 회사에 앙심을 품고 기술을 넘겨 버리는 경우다.
경쟁 회사에서 더 좋은 조건으로 옮길 때 기술을 가져가는 것도 같은 경우다. 얼마 전 논란이 됐던 두산중공업 출신 직원들이 STX로 옮긴 케이스도 여기에 해당한다. 물론 이런 산업스파이들은 돈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고객이 국내기업이든 외국기업이든 가리지 않는 편이다. 다만 그 피해규모를 볼 때 국내 기업들 사이에서 정보를 사고파는 산업스파이들은 양반(?)에 속한다. 국제적 산업스파이들이 유출시킨 기술은 외국과 우리나라의 기술격차를 줄여 장기적으로 다른 나라에 우리의 먹거리를 빼앗기게 만든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의 짊어져야 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우리나라에서 산업스파이들의 활동이 늘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주된 요인은 우리나라가 가지고 있는 기술적 특성 때문이다. 업계 전문가들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원천기술보다 응용기술이 뛰어나다고 한다. 원천기술을 이용해 상업적으로 가치가 높은 상품을 만들어내는 데 탁월한 우리나라 업체들은 그 상업성 때문에 선진국 기업들과 후진국 기업들 모두의 표적이 된다는 것.
상황이 이렇다보니 몇 해 전부터는 정부에서도 산업기술유출 방지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특히 지난 2003년부터 국가정보원 내부에 산업기밀보호센터라는 전담기구를 설치했다. 산업스파이들 몇 명이 팀을 이뤄 장기간에 걸쳐 치밀하게 기술유출을 시도한다 해도 대부분 국외로 빠져나가지 못하는 것은 국정원의 광범위하고 치밀한 정보수집력 덕분이다.
몇 해 전부터 기업들의 보안의식도 높아졌다. 내부직원들의 보안교육에 열을 올리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하지만 이마저도 대기업에 한정될 뿐 여전히 우수한 기술력을 가진 벤처기업들은 기술유출의 사각지대다. 국가와 회사 그리고 개인들이 보안에 대한 중요성을 절감하지 못하면 산업스파이들의 먹이가 되는 건 한순간이다.
박혁진 기자 ph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