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9월 15일 대구 창조경제단지 부지를 방문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이인용 사장에게 설명을 듣는 모습. 사진제공=청와대
SK그룹은 대전 외에 세종시 창조마을까지 맡고 있다. SK그룹은 두 지역에 이미 창조경제혁신센터와 시범사업을 진행해오던 터여서 새롭게 내놓을 사업계획이 사실상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럼에도 SK그룹은 300억 원의 창업투자펀드를 신규 조성하는 한편, 동반성장펀드 중 150억 원을 대전 지역에 배정해 총 450억 원 규모의 벤처육성 종자돈을 새로 마련했다.
재계 관계자는 “SK그룹으로선 삼성그룹이 대구의 옛 제일모직 공장 부지에 창조경제단지를 조성하는데 900억 원을 투자하는 계획을 내놓아 큰 부담을 느낀 것으로 안다”면서 “구속 중인 최태원 회장의 가석방에 우호적인 분위기를 만들려면 박 대통령의 역점 사업에 대출이라도 받아서 지원할 상황이지 않았겠느냐”고 말했다. 최 회장의 경우, 올 연말 성탄절이나 내년 설에 단행될 가능성이 높은 대통령 사면 대상으로 거론되고 있다.
냉정하게 따지면 SK그룹은 현재 위기 상황이다. 주요 계열사들의 동반 실적악화가 심각한 수준이다. 올 상반기 분기 영업이익 1조 원을 돌파한 SK하이닉스를 제외하면 에너지, 통신 주력 계열사들의 부진으로 그룹 실적이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의 절반 수준까지 추락했다.
SK이노베이션의 경우 올해 상반기 영업이익은 1754억 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6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다. SK텔레콤 역시 7985억 원의 영업이익을 거뒀지만 지난해 상반기에 비해서는 84% 수준에 그쳤다. 일각에선 신규 사업 투자 중단은 물론 부실 사업 정리 등의 절차를 밟을 것이란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최태원 회장
지난 6일 윤상직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주최로 열린 ‘주요기업 투자 간담회’에서도 SK그룹은 내년 투자계획으로 SK하이닉스의 경기도 이천 공장 증설 등에 1조 8000억 원을 투자할 계획만 밝혔다. 이 투자 계획은 이미 공표된 것으로, 새로운 투자 사업 계획을 내놓지 못한 셈이다.
삼성그룹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지난 7일 주력 계열사인 삼성전자가 3분기 잠정실적 공시에서 매출 47조 원에 4조 1000억 원의 영업이익을 냈다고 발표한 이후 후폭풍에 몸살을 앓고 있다. 본격적인 실적하락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관측이 유력한 가운데, 4분기 실적에도 관심이 쏠리지만 이 역시 녹록지 않은 게 현실이다.
더 큰 문제는 삼성전자의 실적부진이 경영권 승계에도 불확실성을 점증시킬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삼성전자의 3분기 실적은 사실상 이재용 부회장의 성적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건희 회장이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뒤 사실상 3분기부터 이재용 체제로 삼성전자가 움직여왔기 때문이다. 4분기 실적도 마찬가지다.
사정이 이런데도 삼성그룹은 ‘주요기업 투자 간담회’에서 15조 원 규모의 첨단 반도체 생산 라인이 구축될 평택 산업단지 건설 계획을 내놓았다. 대구창조경제단지 조성에 1000억 원대의 투자계획을 발표한데 이어 두 번째로 통 큰 투자를 결정한 것이다.
또 다른 재계 관계자는 “이건희 회장에서 이재용 부회장으로 넘어가는 경영권 승계작업은 당초 이 회장이 쓰러지기 이전부터 현 정권의 임기 내에 마무리해야 한다는 방침을 정해놓았던 것으로 안다”면서 “공정거래위, 금융감독원 등 경영권 승계과정에서 감독기관에서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처지가 삼성그룹의 처신을 어렵게 하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이건희 회장의 건강 문제, 차기 정권 성격에 대한 불확실성 등을 고려해 상대적으로 친기업적인 행정권력 아래서 경영승계 작업을 진행하자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삼성그룹 내 비상장 기업들의 상장 추진이나 유사부문 간 사업조정은 이러한 승계방침에 따라 진행돼 왔는데, 이 회장이 예상치 못하게 병중인 상황이 이 작업을 더욱 가속화시켰다는 얘기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삼성그룹이 사내 유보금이 많은 상태이기는 하지만 경영승계를 무리 없이 진행하기 위해 배당액을 높이거나 자사주 매입 등에 쓰려면 결코 신규 투자에 넉넉한 수준은 아니다”면서 “더욱이 삼성전자의 주력인 휴대폰 사업은 제품 사이클이 짧아 한번 무너지면 급격히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높은 상태인데 정부 쪽의 주문에 충실하게 부응하고 있는 것을 보면 다른 속내가 있는 게 분명하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삼성그룹이 이 회장의 와병 이후 이 부회장과 최지성 부회장(삼성 미래전략실장)의 투톱체제로 운영되면서 정부에 대한 ‘입김’이 약화된 게 아니냐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경영권 승계와 함께 그룹 내 리더십 교체기간인 만큼 대외적인 변수를 만들기보다 내부 단속에 더 치중하다 보니 정부를 향해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회장이 직접 경영을 관장하던 시기에는 정부 측에 비교적 솔직한 메시지들이 비선라인을 통해 전달돼온 것으로 전해진다.
물론 이러한 사정이 두 그룹에 한정된 것은 아니다. 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현 정권이 집권 3년차에 접어드는 내년에는 실질적인 공적서를 내놓으려 할 것이고, 그에 따라 기업들을 향한 주문도 더 많아질 게 분명하다”면서 “손목 정도가 아니라 팔 비틀기 수준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박웅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