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선 수석부장(왼쪽)의 상무 승진을 두고 현대중공업이 ‘3세 경영’에 시동을 걸었다는 관측이 일고 있다. 위는 울산 현대중공업 전경. 연합뉴스
지난 12일, 일요일임에도 현대중공업 최길선 회장과 권오갑 사장은 오전부터 본부장회의를 긴급 소집했다. 창사 이래 최대 위기에 빠진 현대중공업을 정상화시키기 위한 길을 모색하기 위해서였다. 이 자리에서 최 회장과 권 사장은 현대중공업그룹 조선 3사, 즉 현대중공업·현대미포조선·현대삼호중공업의 임원 262명 전원에게 사직서 제출을 주문했다. 위기의 책임을 회사 각 조직의 리더급인 임원들에게 물은 것이다.
현대중공업은 임원 262명을 모두 한꺼번에 교체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재신임을 통해 새로운 조직에 필요한 임원들을 중용하겠다는 방침이었다. 또 이를 계기로 임원 인사를 조기 실시해 능력 있는 부장급을 조직의 리더로 발탁, 회사와 조직을 젊고 역동적으로 변모시켜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회사의 움직임은 빨랐다. 아무리 앞당긴다 해도 이달 말쯤 실시할 것으로 예상됐던 임원 인사를 지난 16일 전격적으로 실시했다. 임원 262명에게 사표 제출을 주문한 지 불과 나흘 만이다.
현대중공업은 긴급 본부장회의를 소집한 이튿날인 지난 13일 사장단·본부장 인사를 단행한 후 지난 16일에는 임원 인사를 실시했다. 임원 262명 중 31%인 81명의 사직서를 수리하는 고강도 구조조정이다. 정기선 수석부장의 상무 승진을 포함해 31명을 새로 상무·전무로 승진시켰고 부장급이던 28명을 상무보로 신규 선임했다. 현대중공업은 “어려움에 처해 있는 회사에 변화를 주고, 체질개선을 통해 경쟁력을 회복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판단에 따라 조기 인사를 단행했다”며 “조직을 슬림화해 신속한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도록 하고, 여기에 맞는 인사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한 것이 이번 인사의 핵심”이라고 밝혔다.
임원 인사에서 눈에 띄는 사람은 단연 정기선 상무다. 정 상무는 상무보를 거치지 않고 바로 상무로 승진했다. 정 상무의 승진은 이미 지난 12일 예견된 일이었다. 최 회장과 권 사장이 긴급 본부장회의를 소집해 “능력 있는 부장급을 조직의 리더로 발탁”하겠다고 했던 데서 정 상무의 승진은 기정사실화됐다. 1982년생인 정 부장의 올해 나이는 만 32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만 35세에 상무로 승진하고, 현재 만 36세인 구광모 LG그룹 후계자가 부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등 다른 재벌 3, 4세의 경우와 비교하면 빠른 편이다.
정 상무의 승진은 현대중공업의 ‘3세 경영’ 시동으로 해석되고 있다. 정몽준 전 의원의 장남으로서 임원이 된 만큼 현대중공업의 ‘정기선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얘기다. 재계 일각에서는 정 상무 시대를 여는 데 틀을 잡아줄 인물들로 지난 9월 복귀한 최길선 회장과 권오갑 사장이 꼽히고 있다.
그러나 최 회장이 지난 2009년 현대중공업을 떠난 이유를 보면 그의 복귀는 아이러니하다. 최 회장은 2009년 ‘조선 경기 불황 극복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젊고 역동적인 회사로 변화하기 위해’, 더 능력 있는 인물과 후배들에게 자리를 내줘야 한다며 현대중공업을 떠났다. 이는 지난 12일 긴급 본부장회의, 지난 16일 임원 인사 등에서 현대중공업이 밝힌 이유와 같다. 젊고 역동적인 조직으로 변화해 조선 경기 불황 극복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떠난 인물을 현대중공업은 같은 이유로 다시 불러들인 셈이다.
현대중공업 관계자는 “회사에서도 어떤 선택이 가장 적절한지 고심을 많이 했다”며 “그렇다고 완전히 외부에 있는 사람을 영입하기도, 회사를 어려움에 빠뜨린 것으로 평가받는 내부 인물을 승진시키는 것도 이상한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이를 테면 경영 능력이 검증된 적임자를 찾았다는 얘기다.
현대오일뱅크로 옮긴 지 4년 만에 친정인 현대중공업에 복귀한 권오갑 사장도 현대중공업의 정기선 시대의 틀을 잡을 인물로 지목되고 있다. 권 사장은 정몽준 전 의원의 최측근 중 한 명으로 통한다. 권 사장은 또 19년 만에 파업까지 고려하고 있는 현대중공업 노동조합과 원만한 합의를 이끌어내야 하는 임무도 안고 있다.
현대중공업은 최근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새로운 조직’, ‘분위기 쇄신’에 방점을 찍고 있다. 그러나 현대중공업은 분위기 쇄신을 위해 지난 시절 인물들을 복귀시키는 한편, 그들을 제외한 현재 임원들에게 전부 사표를 제출하라고 한 것이어서 일부에서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현대중공업 관계자는 “최 회장과 권 사장은 현재 위기 극복의 적임자”라며 “이들은 9월에 선임된 것이어서 이전 최고경영진은 이미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고 해명했다.
최 회장과 권 사장의 복귀, 정 상무의 승진에는 위기의식을 느낀 정몽준 전 의원의 의중이 깊이 반영돼 있다고 보는 재계 인사가 적지 않다. 아울러 장남 정기선 상무를 통해 전문경영인 체제로 이어져왔던 현대중공업에 오너십을 심겠다는 계산도 작용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오너 입장에서는 위기가 오히려 오랫동안 비워져 있던 오너십을 채울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현대중공업 관계자는 “전체 인사에서 대주주의 뜻이 반영됐다는 해석은 외부의 시각일 뿐”이라며 “회사가 굉장히 어려워졌고, 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최선을 모색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