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로기사 은퇴 선언을 한 문용직 5단 | ||
문용직 5단은 프로기사 중에서도 특이한 존재였다. 그는 세계 최초 유일의 프로기사이면서 정치학 박사다. 문 5단은 평소 남들이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프로기사에게 바둑판 위에서의 승부가 아닌 다른 것들은 구차한 장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건 속되다’고 여기는 사람이다. 그러나 본인의 생각과는 별개로 어쨌든 그는 그 희귀성으로 인해 눈에 띄는 존재였다.
일찍이 기재를 인정받고도 대학 때문에 입단이 늦어지긴 했지만 초창기에는 성적도 좋았다. 1988년 시즌에는 정상가도의 관문인 신인왕전에서 우승했고, 박카스배에서 조훈현 9단과 타이틀을 다투었다. 1988년이면 이른바 ‘조-서 시대’의 막바지. 유창혁과 이창호가 타이틀 무대로 올라오기 시작하던 때였다. 문용직은 그때 서른 살, 승부사로서 대성을 기대하기에는 너무 많은 나이였지만 유창혁-이창호와는 또 다른 방향에서 조-서 이후 판도의 변수 역할을 할 것처럼도 보였다. 그러나 신인왕전 우승, 박카스배 준우승을 기점으로 그가 선택한 길은 승부에 더욱 매진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승부의 현장에서 아예 철군하는 것이었다. 조훈현 유창혁 이창호 같은 승부 천재들의 벽을 실감했다는 얘기를 직·간접으로 들은 기억이 난다.
승부에서 한 발짝 물러서면서 그는 ‘탐구’로 돌아섰고, 개인연구실을 열어 바둑심포지엄을 주관하는 등 10년쯤 내공을 쌓고는 책을 쓰기 시작했다. <바둑의 발견> 상·하권, <수법의 발견> 10권, 그리고 <주역의 발견> 등 발견 시리즈였다. 문명비평가로 20세기 전반을 풍미했던 중국의 린위탕(林語堂)을 좋아했고 린위탕의 불후의 명저 <생활의 발견>은 그가 청년 시절 애독했던 책이었다. ‘발견’은 거기서 따온 것이었다.
문용직의 책들은 바둑 저술의 격조를 높여 준 역저들이었다. <바둑의 발견>을 통해 그는 바둑 동네에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을 들여왔다. 그걸로 바둑 이론의 변천·발전의 역사를 분석해 주었는데, 그의 패러다임에는 철학 심리학 역사학에다가 수학과 통계학까지, 인문학의 거의 모든 분야가 무르녹아 있었다. 이것도 물론 한·중·일을 통틀어 처음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주역에 관심이 쏠리자 주역을 이해하기 위해 한학의 대가였고 금석학자요 역사학자이며 서예가로도 이름이 높았던 고 임창순 선생의 고전연구실인 당시 경기도 가평인가에 있었던 ‘지곡서당’엘 몇 년간 다녔다. 이후 일산의 작은 오피스텔에서 독서와 사색으로 칩거하더니 재작년인가에 <주역의 발견>을 써냈다.
그의 다음 책이 무엇일까를 기다리던 차에 그가 보낸 답신은 은퇴였다. 이유는 있었겠지. 아니,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분명하면서도 담백한 성품의 문 5단은 “그만두고 싶은데 무슨 이유가 있어야 하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은퇴해도 바둑은 둘 수 있고 책도 쓸 수 있는 것이지만 문용직은 아마도 적어도 당분간은 바둑도 두지 않을 것이고 책도 쓰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저 소요할 것이다. 누릴 것과 누릴 시간이 넉넉해 보이는 사람이 그런 걸 버릴 때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주변 사람들은 아쉬운 박수를 보낸다. 남은 사람들끼리 서로 자괴감을 나누며, 위로하면서.
문용직은 뛰어난 바둑학자였다. 명지대 바둑학과가 문용직을 붙잡지 못한 것은 큰 실수였다. 바둑을 위해, 바둑학을 위해 문용직이 바둑학자로 돌아와 줄 것을 기대한다.
이광구 바둑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