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규하 전 대통령은 12·12 군사 쿠데타 주역 전두환의 신군부에 왜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않았는지에 대해선 끝내 침묵을 지켰다. 사진은 지난 2006년 10월 26일 경복궁에서 열린 최규하 전 대통령 영결식. | ||
그런데 이번에 최 전 대통령의 인간적인 면모와 사생활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책이 출간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권영민 전 독일대사가 저술한 <자네, 출세했네>란 책이 그것이다. 권 전 대사는 1979년부터 1980년까지 청와대 비서관을 등을 역임하며 최 전 대통령을 40년 가까이 곁에서 지켜본 인물.
권 전 대사는 이 책에서 최 전 대통령 부부와 얽힌 숱한 일화들을 풀어놓고 있다.
# 각하의 별명은 최 주사?
박정희 전 대통령이 갑작스럽게 서거한 후 생각지도 않게 대통령직에 오른 최 전 대통령은 전두환 신군부가 사실상 권력을 장악했던 그 시기에 국민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상당히 궁금해 했다. 최 전 대통령이 권 전 비서관에게 ‘솔직한 국민들의 생각을 알고 싶다’고 물었다.
‘내가 머뭇거리자 대통령이 대답을 재촉했다. “나에 관해 나쁜 이야기인가? 좋은 이야기인가.” 최 대통령이 집요하고 완고하신 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나는 더 이상 고민하기 싫었다. 또 나 자신과 타협하기도 싫어서 입에서 튀어나오는 대로 불쑥 내뱉고 말았다. “나쁜 이야기입니다. 모두들 각하를 ‘최 주사’라고 부릅니다.”’
이 말을 들은 최 전 대통령은 평소의 이미지와 달리 “뭐야! 최 주사?”라며 격분했다고 한다. 권 전 대사는 “10년을 넘게 모셔왔던 최 전 대통령이 그렇게 화를 내는 것은 처음 봤다”고 밝히면서 “나는 그 순간 청와대를 그만둬야 된다고 생각했다”고 당시를 서술하고 있다.
# 나같은 사람 누가 쏘겠나?
권 전 대사는 최 전 대통령이 청와대 시절 유독 경호원들이 따라 붙는 걸 귀찮아했다고 적고 있다. 잘 알다시피 최 전 대통령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박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헌법에 따라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그래선지 몰라도 최 전 대통령은 항상 “나 같은 사람에게 누가 총을 겨누겠는가”라며 경호를 귀찮아했다는 것이다. 그것을 대변해주는 일화 한 가지.
‘한번은 최 전 대통령이 청와대 경내를 혼자 산책한다는 소식을 듣고 경호실이 발칵 뒤집어진 적이 있었다. 대통령 경호실장이 놀라서 헐레벌떡 뛰어오자 최 전 대통령은 태연하게 “그만 가서 일보라”며 결국 경호실장을 돌려보내고는 혼자서 끝까지 산책을 했다.’
# 배워야 할 공직자
권 전 대사는 최 전 대통령의 청렴결백한 모습을 가장 높이 평가하고 있다. 권 전 대사는 최 전 대통령에 대해 ‘공직자로서 갖춰야 할 청렴결백이라든지 도덕성 등을 실제 생활을 통해 보여주었다. 선행에 대해서는 언론에 비춰지는 것을 극도로 꺼렸고 언제나 언행에 신중했으며 모든 것을 국가의 안위와 발전을 먼저 생각하는 자세를 보여주었다’고 평하고 있다.
실례로 최 전 대통령 부부는 항상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면 된다”며 치장 등 허례허식과는 거리가 먼 검소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최 전 대통령은 1946년 1월 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장으로 시작해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잔여 임기를 승계해 마칠 때까지 34년간의 공직생활을 했다고 한다. 이러한 오랜 공직생활 탓에 청렴결백이 몸에 뱄다는 것이 권 전 대사의 해석이다.
▲ 김대중, 김영삼, 전두환 전 대통령이 고 최규하 전 대통령 영결식에 참석해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 ||
최 전 대통령이 외무부 장관 시절 큰아들을 억지로 군대에 입대시킨 일도 유명한 일화다. 말레이시아에서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영국 옥스퍼드대학에 전액 장학금을 받으면서 유학갈 수 있었던 큰아들을 “한국의 젊은이라면 군대에 갔다 와야 된다”며 국내로 불러들여 군에 입대를 시켰다는 것이다.
# 남편 꼭 빼닮은 홍기 여사
권 전 대사는 이 책에서 최 전 대통령 내외의 검소한 생활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영부인이었던 홍기 여사의 가계부에 대한 얘기도 그 중의 하나.
영부인이 총리 공관 시절 쓰던 가계부 겉장에는 ‘서울시 종로구 삼청동 106번지 국무총리 공관, 국무총리 부인 홍기’라는 이름표가 적혀 있었는데 거기엔 콩나물, 두부 등 부식재료를 구입한 명세서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최 전 대통령 부부가 작고하기 전까지 살던 서교동 사저에는 30년이 넘은 금성라디오, 손지압기, 곰방대, 50년이 넘은 내셔널 선풍기, 석유난로, 하얀 고무신 등이 지금까지도 남아있다고 있다.
권 전 대사는 최 전 대통령과 부인 홍기 여사의 각별한 사랑에 대해서도 서술하고 있다.
홍 여사가 알츠하이머로 투병하던 시절의 일화다. 알츠하이머병을 앓은 홍기 여사는 8년간의 투병생활 중 350여 일을 입원해 있었다. 이때 최 전 대통령은 단 하루도 빠짐없이 병원을 찾아 아내의 건강을 살폈다고 한다. 권 전 지사는 “병원에서 남편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영부인의 손을 꼭 잡고 계시던 최 대통령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 끝내 침묵하다
전두환 등의 신군부에게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않아 우유부단하다는 평을 듣고 있는 최 전 대통령. 왜 당시 전두환의 신군부를 그냥 보고만 있었는지에 대해서 최 전 대통령은 침묵했다. 온갖 추측이 무성했지만 최 전 대통령은 지난 2006년 10월 22일 서거하는 순간까지도 입을 열지 않았다.
최 전 대통령의 회고록의 존재 여부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40년이나 지근거리에서 최 전 대통령을 보필한 권 전 대사의 회고록에서도 이 부분에 대해선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권 전 대사는 “(지난 2006년) 10월 26일 최 전 대통령의 영결식을 보면서 강제구인당해 법정에 가서도 증언을 거부했던 최 전 대통령의 굳은 심지가 떠올랐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권 전 대사는 이 책에서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은 꼭 해야만 하는가”라고 반문하고 있다. 그리고 권 전 대사는 그 반문에 대한 답으로 최 전 대통령이 몸소 “그렇지 않다”고 침묵으로 답하고 세상을 떠났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권 전 대사가 최 전 대통령 대신이나마 전두환 신군부를 향해 던지고 싶은 말은 남아 있었던 듯하다. 권 전 대사가 최 전 대통령의 영결식장에서 마주쳤던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한 생각을 적은 부분이 바로 그 대목이다.
‘영결식장 맨 앞줄에 눈을 감고 앉은 한 전직 대통령의 모습은 피해자와 가해자의 뒷날이 이렇게 무상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피해자는 말이 없고, 한마디 사과의 말도 없이 피해자 주검 앞에 앉은 가해자의 당당한 모습은 도덕률의 존재를 의심하게 하는 광경이었다.’
김장환 기자 hwan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