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악에 빠진 증권사 트레이더 고영진 씨. 그는 집에 홈 스튜디오도 갖춰 놓았을 정도로 취미생활에 열성적이다. | ||
직장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시간과 비용을 투자해 레코딩 작업을 하고 있는 고 씨는 나중에 자신만의 앨범을 내고 싶은 소망이 있다. 그는 “주식시장이 어렵지만 음악을 하면서 얻은 긍정적인 마인드가 시너지 효과를 내 좋은 성과를 내고 있다”며 “항상 재충전되는 느낌이라 고객들을 만날 때도 활기차 보인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고 말했다.
편집디자이너로 일하는 장유정 씨(여·33)는 ‘브라이스(Blythe) 인형’에 빠져 있다. 브라이스 인형은 큰 머리에 가냘픈 몸을 가진 손바닥 크기의 ‘패션 돌’이다. 의상과 헤어스타일, 심지어 화장법이나 눈의 색까지 바꿀 수 있다. 일본과 우리나라 여성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어 관련 상품도 다양하고 동호회 모임도 활발하다.
장 씨는 이러한 브라이스를 입히고 보살피는 데 정성을 아끼지 않는다. 옷이나 화장 스타일도 자주 바꿔주고 머리색에도 변화를 준다. 회사에도 늘 가지고 다녀 그의 책상 위 모니터 옆에는 항상 브라이스 인형이 자리하고 있다. 손재주가 좋아 최근에는 원단을 사서 인형 옷을 직접 만들기도 한다. 장 씨는 “인형 옷을 만들 듯 직장 동료들에게도 담배 케이스 등을 만들어 선물했더니 좋아하더라”며 “회사 다니는 것도 즐거워지고 관련 동호회를 통해 친구도 많이 생겼다”며 미소를 머금는다.
오디오 분야에도 홀릭족이 꽤 많다. 다만 다른 홀릭보다 큰돈이 들어 실제 마니아층이 두텁지는 않다. 유명한 건축설계사인 황준 씨(44)는 홀릭을 넘어 전문가 경지에 올랐다. 오디오 관련 입문서와 매뉴얼 서적에 이어 자신의 오디오에 대한 관심을 인생 이야기 식으로 풀어낸 <어느 날, 내가 오디오에 미쳤습니다> 등 총 세 권의 책을 내기까지 한 것.
대학시절 우연히 오디오의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된 황 씨는 세밀한 직업적 특성과 오디오가 잘 맞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블로그에 올린 다양하고 재미있는 오디오 이야기로 일찍부터 많은 오디오 홀릭족에게 눈길을 받아왔다.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굵직한 건축물들을 설계해 나가는 와중에도 오디오에 대한 사랑은 이어진 셈이다.
오디오처럼 사람들의 관심을 많이 받는 홀릭 분야 중 하나가 IT와 커피다. 쉽게 정보를 접할 수 있어 숨은 실력자들도 상당하고 한 종류에서도 관심분야가 여럿으로 갈리기도 한다. 스스로를 “디지털 제품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30대 직장인”이라고 표현하는 박 아무개 씨. IT 관련 분야 중 특히 노트북에 빠져 있다. 새로 나온 노트북은 하루라도 빨리 직접 만져봐야 직성이 풀린다. 빤한 유리지갑 직장인이 수없이 쏟아지는 신제품을 다 소화할 순 없는 노릇. 그는 중고시장을 활용하고 있다. 제품을 사서 곱게 쓰고 다시 중고로 팔아 돈을 보태 또 다른 제품을 사는 것.
박 씨는 노트북을 써보고 제품에 관한 리뷰를 꼼꼼하게 작성해 블로그에도 올린다. 그는 노트북의 속도를 최적화하는 프로그램이나 내부 부품까지 꿰뚫고 있어 회사에서도 ‘컴박사’로 불린다. 동료들도 컴퓨터가 말썽이면 으레 그렇다는 듯 박 씨에게 부탁한다. 노트북이나 다른 IT 제품을 구입할 때도 그에게 자문을 구한다. 박 씨는 “고가의 제품이라 직접 구입하지 못할 때는 전자상가 매장에 근무하는 친구에게 부탁한다”며 “단 며칠만이라도 써보는 것과 제품 리뷰만 보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라고 설명했다.
IT만큼 대중적인 커피의 경우 그만큼 맛에 까다로운 사람들이 많다. 무역회사에 근무하는 30대 중반의 이 아무개 씨는 자신이 직접 커피 원두를 볶고 갈아서 내려 마신다. 고가의 커피머신도 있지만 집에서 쓸 수 있는 간단한 도구를 이용할 때도 많다. 최근 유명 커피전문점들에서 단골들을 위해 바리스타 강습을 실시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씨는 이러한 기회도 적극 이용한다.
그는 “근무하다 보면 지치고 피곤한 시간이 꼭 찾아오는데 이럴 때면 커피 생각이 간절해진다”며 “맛있는 커피 한 잔으로 업무 스트레스가 확 풀리는 느낌”이라고 전했다.
조금은 특이한 물건에 열광하는 홀릭족도 있다. 바로 군장 마니아다. 밀리터리 문화에 관한 물품이라면 무엇이든 모은다. 오리지널 군장의 경우 풀세트로 완비하려면 1000만 원이 넘는 경우도 허다하다. 서울메트로에 근무하는 이승용 씨(40)는 각국의 군복 900여 벌과 군화 120족을 소장할 정도로 밀리터리 문화에 푹 빠져 있다. 관련 인터넷 카페도 직접 운영한다.
이 씨는 해방 후 미군이 제공한 한국군 건군 초기 오리지널 군복 한 세트를 구비하는 데 10년이 걸렸다고 한다. 진품은 워낙 희귀한 데다 가격도 비싸 이렇게 긴 세월이 걸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 씨는 “전쟁에 관한 부정적인 인식으로 오해를 받는 경우도 있지만 가만히 앉아서 컴퓨터 게임이나 의미 없는 술자리를 가지는 것보다 훨씬 건전하고 좋은 취미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밀리터리 바이러스’는 이 씨 가족들에게도 퍼져 지금은 함께 즐기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홀릭’에 대해 일단 무료한 일상과 업무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한 법. “만족을 주는 것에 집중하는 것은 좋지만 다른 일과의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다.
이다영 프리랜서 dylee2@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