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히 쉬소서 - 5월 29일 서울광장에서 노제를 마친 운구 행렬이 영정을 앞세우고 서울역쪽으로 향하고 있다. 임영무·박은숙 기자 | ||
이 같은 추모 열기는 이명박 정권에 큰 숙제를 던져줬다. 전 국민적인 추모분위기가 형성되면서 현 정부의 강경모드는 제동이 걸리게 됐다. 현 정부에 대한 반감은 추모기간 내내 고스란히 드러났다. 영결식장에서 이 대통령이 헌화할 때 쏟아졌던 야유는 향후 정부의 국정운영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을 암시하는 하나의 징후였다. 슬픔과 분노가 교차했던 고 노 전 대통령의 노제 현장을 둘러봤다.
29일 오전 7시 50분. 서울광장을 둘러싼 전경버스가 철수하자 추모객들이 구름같이 광장으로 몰려들었다. 한두 시간이 지나자 서울광장이 꽉 찬 것은 물론이고 세종로와 한국은행 근처까지 추모객들로 가득 찼다. 영결식은 세종로 주변 빌딩에 있는 대형스크린과 서울광장에 설치된 스크린을 통해서 생중계 됐다. 지나가던 시민들도 걸음을 멈추고 영결식을 지켜봤다. 노란 모자를 쓰고 손에는 노란 풍선을 든 50만 명의 시민들이 모여 서울광장을 가득 메운 것 자체가 하나의 장관이었다. 수 십만 명이 몰렸지만 무질서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노 전 대통령과 시민들 사이에 다리를 놓은 것은 ‘노래’였다. 평소 노 전 대통령이 즐겨 불렀다는 노래 ‘상록수’를 가수 양희은이 부르자 곳곳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날 노제의 하이라이트 역시 노제 후반부에 ‘사랑으로’를 같이 부르던 장면. 스피커를 통해 노 전 대통령이 직접 부른 ‘사랑으로’가 흘러나오자 일순간 분위기가 무거워졌고 시민들은 권양숙 여사를 비롯한 장례 위원들이 앉아있는 곳을 향해 일제히 기립했다. 사회자의 선창에 맞춰 시민들은 노래를 불렀고 이에 장례위원들도 함께 일어나 화답하듯 합창했다. 스크린에서는 노 전 대통령의 생전 영상이 흘러나와 노래를 부르는 이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 오열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 청와대사진기자단 | ||
추모객들은 노 전 대통령을 쉽게 보내지 않았다. 서울광장에서 서울역에 이르는 길은 조문 인파로 인해 차 한 대가 지나갈 틈이 겨우 생겼다. 뒤를 따른 4만여 명의 시민들은 서울역 앞 도로를 가득 메웠다. 이 때문에 화장장인 수원 연화장으로 떠난 시각이 3시간이나 늦춰졌다.
국민장 기간 내내 뜨거웠던 추모 열기는 현 정권에는 큰 짐으로 남게 됐다. 500만 명을 훌쩍 뛰어넘는 조문객의 숫자는 향후 제기될 현 정권 책임론에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 최소 500만 명 이상이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에 대한 반감은 29일 노제 현장에서도 쉽게 감지됐다. “경찰은 서민을 죽이고, 검찰은 노무현을 죽이고, 이명박은 국민을 죽인다”, “떡검의 사법살인” 등 시청 앞 덕수궁 돌담길에는 현 정권과 검찰의 책임을 묻는 글귀들이 가득했다.
시청 앞 광장에 모인 사람들의 입에서도 현 정권을 비난하는 말들이 연신 쏟아지고 있었다. 한편에서는 ‘MB 탄핵 1000만 서명 운동’이 벌어졌다. 서울광장에 모인 추모객들은 마치 80년대 군사정권을 향한 ‘타도가’를 외치듯, 스피커 차량에서 울려 퍼지는 구호에 맞춰 “독재타도, 명박퇴진”을 외쳤다.
현 정부에 대한 반감이 가장 잘 나타났던 때는 영결식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헌화할 때였다. 스크린으로 영결식을 지켜보던 시민들은 이 대통령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자 ‘경복궁까지 함성이 전해져야 한다’며 일제히 야유를 퍼부었다.
그러나 현 정권에 대한 반감이 물리적인 행동으로 나타나지는 않았다. 오히려 시민들은 냉정했다. 민심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움직임에 대해선 경계심을 나타냈다. 시민들은 정치적 선동구호가 담긴 전단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일부 진보 단체에서 만든 ‘정권퇴진’과 같은 전단지는 노제가 끝난 이후에도 대부분 그대로 쌓여있었다.
물론 전혀 충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후 3시경 서울광장 사용을 놓고 일부 추모객들과 경찰과의 몸싸움이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일부 시위대가 경찰 버스를 발로 차기도 했다.
4시 30분경에는 시민들이 폴리스라인을 넘어 전경의 방패라인 바로 앞까지 전진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한 시민은 “도대체 이 정권이 뭐가 무서워서, 무엇을 숨기고 싶어서 사람들의 행진 자체를 가로막는 것이냐”고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일부 시민들이 “전경이 무슨 죄냐. 이들에게는 폭력을 행사하지 말자”고 하면서 다행히 무력 충돌은 벌어지지 않았다.
5시가 넘어서자 시청 앞 광장의 분위기가 일순 바뀌기도 했다. 일부 시민들이 노 전 대통령 서거에 대한 정권의 책임과 추모보다는, 현 정권의 정책을 비판하는 데 열을 올렸다. 한 대학생은 확성기를 들고 현행 등록금 문제를 외쳤다. 한 사람은 미디어 법 개정의 문제를 시민들에게 외쳤다.
하지만 상당수의 시민들은 이런 기류에 휩쓸리지 말자며 화제를 바꿨다. 한 시민은 “추모의 날인 만큼 이분법적 사고로 편 가르기 하지 말고 노 전 대통령을 기리는 마음을 유지하자”고 말했다. 실제로 30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민주노총 주최의 범국민대회에는 1000여 명도 되지 않은 인원이 모였을 뿐이다.
한 시민은 기자에게 다가와 “일부 선동가들이 이 추모 열기를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이분법적 사고로 나눠 선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계동에서 왔다는 김 아무개 씨는 “추모 열기가 폭력성을 띠게 되면 행사의 의미가 퇴색하고 폭도로 몰릴 수 있다”며 “조용히 집에 돌아가 ‘와신상담’하는 것이 정부에게는 더 무서운 메시지”라고 말했다.
박혁진 기자 ph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