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년 제주여행 사진. 오른쪽 장발 청년이 문병호 의원으로. 왼쪽 아래와 비교해보면 세월을 실감할 수 있다. | ||
열린우리당 문병호 의원의 좌우명은 ‘중용’이다. 급진·과격한 사회개혁보다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국민적 이해를 구할 수 있는 점진적 개혁의 필요성을 알게 되면서 나름대로 세운 삶의 기준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합리적 개혁성’은 하루이틀 만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70년대 학번이라면 의례 그랬듯이 문 의원도 지하서클 활동, 민주화 투쟁을 했고 강제징집을 당하면서 나름대로는 ‘과격 운동권’의 엘리트 코스(?)를 밟아 왔다. 그러던 그가 ‘지식인의 역할’을 고민하며 사법시험에 합격, 인권변호사로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것은 대학에 입학한 지 10년째되던 1989년의 일이었다.
“사실 사법시험 공부를 한다는 것은 당시 운동권 사이에선 부끄러운 일이었죠. 그래도 나름의 삶의 원칙은 지키기 위해 노력했고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큰 후회는 없는 삶이었던 것 같은데…(웃음).”
사진은 1980년 여름 초등학교 친구들과 제주도로 여행을 갔을 때 찍은 사진. 사진 오른쪽의 장발을 한 사람이 문 의원, 그 옆이 문 의원실의 김현성 보좌관이다.
시국사건, 노동분쟁 등을 주로 다루던 문 의원은 지난 1999년 민변의 추천으로 옷로비 특검팀 수석수사관으로 활동하며 이름을 세상에 알렸다. 당시에 대해 문 의원은 “옷로비 사건을 맡으면서 많은 걸 배웠어요. 우선 언론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배웠고 언론개혁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배웠죠. 전혀 사실이 아닌 내용들이 연일 신문 1면을 장식하더라고, 그리고 앙드레 김씨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도 알았죠. 아주 겸손하고 민간외교 차원에서도 큰 인물이라고 느꼈던 게 기억에 남아요”라고 말했다.
17대 국회에서 문 의원이 세운 목표는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정치를 해보고 싶다”는 것. “새 정치에 대한 국민의 욕구로 당선이 된 만큼 국민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정치를 해보고 싶다”고 말한다.
또 문 의원은 “훌륭한 법과 제도가 활용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다”며 “새로운 제도의 도입보다는 기존의 법과 제도를 국민을 위하는 방향으로 살려내는 데 일조하고 싶다”는 포부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