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18일 박근혜 대통령이 국민안전처 장관을 비롯한 장·차관급 11명의 정무직 인사를 단행한 결과를 두고 새누리당을 비롯한 여권에서는 이런 평가가 주를 이뤘다. ‘육법당(陸法黨)의 부활’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선친 박정희 전 대통령처럼 육군사관학교와 법관 출신을 중용해 온 박 대통령의 인사 스타일이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는 평가였다. 장관급 2명, 차관급 9명의 인사가 전체 내각의 색깔에 영향을 주기는 어렵겠지만 이번 인사 결과는 그 이상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최수현 전 금융감독원장의 사퇴로 연말연시 개각 가능성이 높아진 상황에서, 이번 인사 결과를 통해 차기 내각의 윤곽을 그려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19일 열린 국민안전처·인사혁신처 공동출범식에서 참석자들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사진 왼쪽부터 이성호 국민안전처 차관. 정홍원 총리, 이근면 인사혁신처장.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이번 인사에서도 재확인됐듯이 고시, 법조인, 군 출신을 선호하는 박 대통령의 스타일은 다음 개각에도 그대로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높다. 공직사회에서 검증된 테크노크라트들을 중용함으로써 국정운영의 안정성과 일사불란함을 기하겠다는 기조가 앞으로도 유지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실제로 세월호 참사 여파로 신설된 국민안전처의 경우 장관급 1명과 차관급 3명이 모두 제복조로 채워졌다. 해군사관학교 28기 출신으로 해군대장을 역임한 박인용 전 합참차장이 국민안전처 초대 장관에 발탁됐고, 육사 33기에 3군단장을 지낸 이성호 안전행정부 2차관이 차관에 임명됐다. 중앙소방본부장에는 소방간부후보 4기 출신의 조송래 소방방재청 차장이, 해양경비안전본부장에는 경찰간부후보 32기 출신의 홍익태 경찰청 차장이 발탁됐다.
군, 경찰, 소방공무원 등 진정한 제복조가 아니더라도 관료 출신의 강세는 여전했다. 장관급의 공정거래위원장(정재찬 전 공정위 부위원장)과 차관급의 통일부 차관(황부기 통일부 기획조정실장), 행정자치부 차관(정재근 안행부 지방행정실장), 국민권익위원회 부위원장(김인수 국민권익위 기획조정실장) 등이 모두 내부 승진을 통해 발탁됐다.
장명진 신임 방위사업청장도 정통 군인 출신은 아니지만 국방과학연구소에서 뼈가 굵은 준관료다. 11명의 인사 중 순수 민간 출신은 이근면 인사혁신처장과 김상률 청와대 교육문화수석, 2명에 불과했다.
안정성을 중시하는 데 방점이 찍힌 제복조 선호 기류 속에 나타나는 또 다른 특징은 공직사회에 대한 개혁 의지다. 세월호 참사의 원인을 지난 60년간 쌓여 온 적폐에서 찾으면서 ‘국가 대개조’를 추진하겠다고 호언해 온 국정기조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임을 예고한다. 박 대통령은 우선 제복조를 등용하면서도 현장 경험과 성과를 중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국민안전처를 이끌어 갈 박인용 장관 후보자와 이성호 차관은 모두 군 출신이면서도 ‘작전통’으로 꼽히는 인물들이다. 박 후보자는 해상과 합동작전 전문가로 꼽히고, 특히 이 차관은 지난 2011년 합참 군사지원본부장 재직 당시 ‘아덴만 여명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던 인물이다. 세월호 참사 당시 해경 등이 우왕좌왕하는 바람에 인명피해가 커졌다는 지적이 나왔던 것을 의식한 결과로 해석된다. 조송래 본부장도 중앙소방학교장과 119구조구급국장을 거쳤고, 홍익태 본부장은 2004년 태국 쓰나미 당시 영사로서 교민 안전을 확보하는 데 활약한 인물이다.
인사혁신처장에 ‘삼성맨’을, 방위사업청장에 정통 군인이 아닌 국방과학연구소 전문연구위원 출신을 발탁한 것도 박 대통령의 공직사회 개혁 의지를 반영한 결과로 풀이된다. 이근면 처장은 약 30년간 삼성코닝과 삼성SDS, 삼성전자 등을 두루 거친 ‘인사통’이다. 특히 지난 1993년부터 시작된 삼성의 인사 혁신을 이끈 주역 중 한 명으로 통한다. 당시 삼성은 서류전형을 폐지하고 삼성직무적성검사(SSAT)와 면접만으로 신입사원을 뽑는 ‘열린 채용’을 도입, 학연과 지연에 얽매인 사내 문화를 근본적으로 뒤집어 놨다. 연공서열 중심의 보상 시스템도 초과이익분배금으로 대변되는 성과 보상 시스템으로 바꿨고, 여성 인력에 대한 차별도 획기적으로 근절해 나갔다.
장명진 청장은 36년간 국방과학연구소에서 지대지 유도탄 개발사업부장, 종합시험본부장 등을 역임했다. ‘백곰’, ‘현무’ 등 국내 유도 무기 개발의 산증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국방부 내에서는 비주류에 속하지만 가장 시급한 개혁과제로 떠오른 방산 분야의 현장 전문가인 셈이다.
이 처장과 장 청장을 등용한 것은 그 자체로 ‘관피아’, ‘군피아’ 등 공직사회의 적폐를 과감하게 도려내겠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도 이 처장에 대해 “민간 기업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시각에서 공직인사 혁신을 이끌 적임으로 기대돼 발탁했다”고 설명했다. 장 청장에 대해서는 “방산 비리를 척결하고 침체된 조직 분위기를 쇄신할 적임자로 판단돼 발탁했다”고 밝혔다.
안정과 개혁이라는 큰 물줄기와 함께 향후 개각에서 중요한 척도가 될 요인은 충성도와 인사청문회 통과 가능성이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우선 박 대통령이 집권 3년차에 들어가고 2016년 제20대 총선을 준비하는 기간인 2015년에는 여권 내 차기 주자들의 본격적인 용틀임이 시작될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새누리당 친박계 인사들이 “내년부터는 김무성 대표에 대해 할 말은 하겠다”는 얘기를 스스럼없이 하는 것도 이런 사정을 잘 보여준다. 박 대통령으로서는 조기 레임덕을 차단하기 위해서라도 충성도 높은 인사들로 친정체제를 강화함으로써 국정 장악력을 유지하게 될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박 대통령의 뿌리 깊은 ‘인사청문회 트라우마’도 친박계 정치인들의 적극적인 발탁 가능성을 높이는 요인으로 분석된다. 안대희, 문창극 등 국무총리 후보자가 연이어 낙마하는 식의 인사 참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혹독한 인사검증을 견뎌낼 수 있는 정치인들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 청와대 관계자는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개각에 대비해 입각 가능한 당내 인사들에 대해 검토가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안다”며 “산발적으로 언론에 개각설이 보도되는 것도 이런 사전검증 과정에서 포착된 것일 수 있다. 인사청문회 부담이 커지면 커질수록 정치인 등용폭이 더 넓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이런 인사 기조와 별개로 개각이 국민의 지지를 받고 내각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하려면 박근혜 대통령이 국정운영 스타일에 변화를 줘야 한다는 지적도 여전하다. ‘영도적 리더십’, ‘최고존엄적 리더십’이라는 비판을 받아 온 박 대통령의 만기친람형 국정운영 방식으로는 누구를 장·차관이나 참모로 앉혀도 소용없을 것이라는 얘기다.
새누리당 비박계 중진 의원은 “육법당, 제복조, 친박독식 인사는 결국 앞으로도 대통령이 혼자 다 하겠다는 의미밖에 안 된다”며 “이런 만기친람형 리더십이 내각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결과적으로 모든 국정 실패의 책임을 대통령 혼자 뒤집어쓰는 악순환을 낳는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고 비판했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