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1부(주심 고영한 대법관)는 지난달 보험설계사 허 아무개 씨(여·48)가 성동세무서장을 상대로 낸 증여세부과처분 취소 소송에서 피고 측 상고를 기각하고 “증여세 처분을 취소하라”며 허 씨의 손을 들어줬다. ‘증여’가 아닌 ‘거래’인 만큼 증여세를 부과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사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허 씨는 지난 2010년 6월 9일 어머니인 황 아무개 씨 소유인 서울 노원구 하계동의 C 아파트 1채에 대한 소유권이전등기를 마쳤다. 지난 2002년 “아파트 소유권을 1억 4400만 원에 넘겨받기로 하고, 10년간 매달 120만 원씩 나눠서 주겠다”고 약속한 내용에 따라 체결된 두 사람 간 매매계약에 따른 것이었다.
허 씨는 2007년 10월~2012년 3월 월 120만 원씩 총 6310만 원, 2012년 9월~2013년 1월 총 600만 원 등 모두 6910만 원을 아버지 허 씨 계좌에 입금했다. 허 씨는 아파트를 담보로 한 6200만 원의 채무도 이어받았다. 허 씨와 황 씨 부부가 허 씨에게 받은 금전적 대가는 총 1억 3000여만 원 상당. 별다른 소득이 없던 부부는 딸에게서 받은 돈을 생활비로 사용했다.
하지만 이 같은 ‘거래’를 세무당국은 증여로 판단하고 증여세를 부과했다. 허 씨가 월 120만 원씩 입금한 돈은 부모에게 보내는 생활비였을 뿐 부동산은 부모가 자식에게 물려준 것이라는 논리였다. 2012년 2월 성동세무서는 아파트 가격을 1억 6000만 원으로 산정하고 이 가격을 바탕으로 주택 증여에 대한 증여세 2100여만 원을 고지했다. 허 씨가 이에 불복해 조세심판원에 심판을 청구하자 세무당국은 허 씨가 넘겨받은 채무부담 6200만원에 대한 부분을 제하고 920여만 원의 증여세를 내도록 다시 결정했다. 계약 전체를 ‘매매’라고 주장한 허 씨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소송을 냈다.
1심과 2심, 대법원은 모두 허 씨의 주장대로 이 계약이 ‘매매’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이 거래를 “소유주택을 담보로 맡기고 평생 동안 연금방식으로 매월 노후생활자금을 지급받는 주택연금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고 했다. 계약했던 1억 4400만 원과 실제 지급된 액수가 다소 차이가 나는 부분은 “어머니와 딸의 관계인 점을 고려하면 부자연스럽지는 않다”며 문제 삼지 않았다.
이번 대법원 판단으로 부동산을 갖고 있는 은퇴자 부부들은 노후자금 마련을 위한 새로운 길이 열리게 됐다. ‘상속’과 ‘노후자금 해결’을 두 가지 모두 해결할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일부 은퇴자들은 상당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주택을 담보로 연금을 받아 생활하는 ‘역모기지론’ 등 시중 금융상품의 경우 노후자금을 마련할 수는 있지만 사후 집을 팔아 대출금을 갚아야 해 집을 자식들에게 물려주긴 어려웠다.
다만 법률 전문가들은 이번 판결로 ‘자식연금’이 무조건 허용된다는 것은 아니라고 입을 모았다. 이 사건 하나만 두고 거래인지, 증여인지를 판단했을 뿐 자식연금에 대한 사법적 판단을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대법원 관계자는 “이번 판결이 자식연금의 존재 자체를 인정했다고는 볼 수 없다. 공식적으로 ‘자식연금’이란 표현이 사용된 적도 없다”며 “부모와 자식 간 계약에 대한 법적 분쟁이 있다면 모를까 이번 사건으로 자식연금에 대한 사법적 판단이 내려졌다고 봐서는 안 될 것”이라고 했다. ‘자식연금’을 전제로 부동산을 넘겨줬는데 자녀가 연금을 제때 지급하지 않았을 경우라면 법원이 ‘자식연금’의 존재를 인정할지 여부를 판단할 테지만 이번 건은 그런 판단까지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자식연금’은 연금을 받더라도 임의 계약을 통해 자식이 자산가치에 비해 적은 돈을 지급하거나 가족이 함께 살아 보낸 돈을 가족이 공유해 거래 자체가 무의미한 경우 등 증여세를 피하기 위한 탈세 목적으로 악용될 가능성도 있어 엄격한 조건 정비가 선행돼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부모의 경제사정에 대한 판단과 주택가격 산정의 객관적 기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부모와 자식간 충분한 합의가 이뤄졌고 정당한 가치산정이 이뤄진 상태에서 임의의 ‘자식연금’ 계약을 맺은 상태라면 이번 대법원 판결로 계약의 사법적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게 된 것이어서 의미가 있다. 합리적 계약 하에서 연금 형식의 거래가 이뤄졌다면 대법원이 이를 ‘매매’라고 인정한다는 판례가 마련된 셈이기 때문이다. 가사·행정사건을 전문으로 하는 한 변호사는 “이번 사건과 같이 부모와 자식 간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정한 계약에서 ‘매매’라고 판단할 기준이 마련됐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조정수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