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은 고 씨 재판과 관련, 절차상의 문제를 지적하며 두 차례나 파기환송심을 했다. 사진은 대법원 판결문.
2003년 2월 고 아무개 씨(61)는 사기 사건에 연루됐다. 한 철거회사와 관련된 일을 하던 그는 하도급 일감을 주겠다며 폐기물 운반 업체를 속여 업체로부터 1억 1300만 원을 받아낸 혐의로 결국 고소를 당했다. 고 씨 사건을 수사했던 검찰은 2009년 1월 고 씨를 기소해 재판에 넘겼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발생했다. 법원에서 재판을 열기 위해 고 씨에게 수차례에 걸쳐 소환장을 보냈지만 번번이 고 씨에게 전달되지 않았던 것. 고 씨에 따르면 그의 당시 주소지는 경기도 고양시로 되어 있었지만 개인적인 사정으로 경남 김해에 머물고 있는 상황이었다.
고 씨 소재지를 파악하지 못해 소환이 어렵다고 판단한 법원은 ‘궐석재판’을 열기로 결정했다. 궐석재판은 피고인이 소환이 어려울 경우, 피고인이 출석하지 않은 상황에서 열리는 재판이다. 궐석재판은 그대로 열려 2009년 1월 1심에서 고 씨의 혐의가 인정돼 징역 1년이 선고됐고, 2010년 7월 2심에서도 징역 1년이 확정됐다. 하지만 행방이 파악되지 않은 고 씨는 아직 수감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2012년, 고향인 경기도 고양시로 돌아온 고 씨는 자신과 관련해 주변에서 이상한 소문을 듣게 됐다고 한다. 고 씨는 “예전에 사기 사건에 연루된 적이 있었지만 다 마무리된 줄 알았다. 그런데 주변에서 그 일과 관련해 자꾸 무슨 일이 생겼다고 얘기하더라. 결국 경찰서로 직접 찾아가 확인해보기로 결심했다”라고 전했다.
경찰서를 찾은 고 씨는 경찰관에게 자신의 신원 파악을 요청했다. 경찰관이 고 씨를 검색하자, ‘전과자’라는 사실이 떴다. 고 씨도 경찰관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경찰관은 즉시 현행범으로 파악하고 고 씨에게 수갑을 채웠다. 고 씨는 “내가 전과자라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무엇보다 재판이 나도 모르게 진행되고 이미 완료됐다는 것에 너무 놀랐다”라고 전했다.
고 씨는 2012년 12월에 수감됐다. 징역형을 살고 있던 고 씨는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억울했다고 한다. 결국 고 씨는 법원에 ‘상소권 회복’을 신청하기에 이른다. 상소권 회복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재판 결과가 확정된 경우, 2심이나 3심의 상급 법원에서 다시 재판 받을 권리를 되돌려 달라고 요청하는 제도다. 고 씨의 상황을 감안해 상소권 회복은 받아들여졌고, 고 씨는 곧바로 대법원에 상고했다. 그런데 대법원에서 놀랄 만한 사실이 발견됐다. 고 씨의 궐석재판에서 중요한 절차가 하나 누락된 것으로 파악됐기 때문이다.
의정부지방법원 홈페이지 캡처.
대법원은 이를 두고 재판의 결정적인 하자로 판단했다. 재판부는 “설사 공소장을 공시송달할 서류 목록에 포함시켜 송달했다 하더라도 피고인이 실제로 이를 수령하거나 법정에 출석해 다퉜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사정만으로, 이와 같은 법령 위반의 하자가 묵과될 수 없다”라고 지적했다. 대법원은 고 씨의 사건을 다시 심리하라며 재판을 2심 재판부로 되돌려 보냈다. 고 씨의 사건을 다시 맡은 2심 재판부는 고 씨의 형을 징역 1년에서 10개월로 깎아주기에 이른다. 고 씨가 피해자들과 합의한 점, 고 씨가 사기를 통해 실질적으로 취한 이익이 없는 점을 감안한다는 취지였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고 씨는 “2심 재판에 중요한 하자가 있다”며 또 다시 대법원에 상고했다. 공시송달 절차를 어긴 1심 재판부부터 문제인데, 2심 재판부가 1심 재판을 토대로 재판을 또다시 연 게 문제라는 지적이었다. 주목할 만한 점은 고 씨의 이러한 지적을 대법원이 또 다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제1심 공판절차에서 이루어진 소송행위는 효력이 없으므로 원심으로서는 적법한 절차에 의하여 소송행위를 새로이 한 후 원심에서의 진술과 증거조사 등 심리결과에 기초하여 다시 판결하였어야 한다”며 다시 재판을 1심 재판부로 되돌려 보냈다.
간단한 사기 사건이 이렇게 복잡다단한 과정을 거치는 동안 고 씨는 징역 10월을 살고 지난해 10월 출소했다. 하지만 2차 파기 환송심을 통해 고 씨는 다시 1심부터 또 다시 재판정에 설 처지에 놓였다. 고 씨는 “말 그대로 징역 10월을 ‘선불’로 산 것 아니냐. 이것은 엄연한 불법 감금이다. 또 다시 재판을 어떻게 받아야 할지 모르겠다”라고 전했다. 고 씨는 1심 재판을 맡았던 판사를 경찰에 고소하는 한편, 1심과 2심을 맡았던 형사 2부 재판부에 대한 ‘법관 기피 신청’을 했다. 기피 신청은 받아들여져 현재 의정부지법 형사 1부 재판부가 이 사안을 검토하고 있다. 지난 13일에는 이 사안과 관련, 형사 1부 재판부에서 공개 재판이 열리기도 했다.
의정부지법 내부에서도 이 사안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분위기다. 만약에 재판을 다시 받은 고 씨가 징역 10월이 또다시 확정된다면, 이미 형을 산 것으로 인정된다. 하지만 고 씨가 무죄가 된다면 국가가 손해배상을 해줘야 하는 상황에 이르고, 형이 더 많이 선고된다면 또 다시 징역형을 서야 하는 상황이 예상될 수 있다.
법원은 일단 이 사건에 대해 재판을 지켜보자는 입장이다. 의정부지법 관계자는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재판 절차에서 실수를 저지른 관계자들에 대한 진상조사나 징계 여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재판이 끝나봐야 알 수 있을 것”이라며 “어찌됐건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긴 하다. 이제까지 의정부지법에서 이런 경우는 한 번도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전했다. 의정부지법에 따르면 법관 연수원에서 이 사안을 두고 교육까지 실시했다고 한다. “다시는 이런 실수를 하지 말라”는 취지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박정환 기자 kulkin85@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