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7년 조일환씨 고희연 | ||
“하나도 안 무섭지? 친할아버지 같지? 그치?”
영정사진 속의 조 씨는 그렇게 즐겨 쓰던 중절모를 쓰고 웃고 있었다. 불과 얼마 전 “저녁에 소주 한잔 해요~” 했던 목소리가 다시 들리는 듯 생생하다.
“목사가 됐으면 술 마시면 안되죠! 남들이 보면 욕해요~”라는 측근 이덕일 목사의 노골적인 타박에도 불구하고 조 씨는 술을 끊지 않았다. 아니 못 말리는 애주가였다. 흡연은 안했지만 사람 좋아하고 호탕한 조 씨는 40년이나 어린 여기자와도 스스럼없이 소주잔을 기울일 만큼 소탈했다. 자신의 고희연 다음날에는 잔뜩 쉰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와 “아유~ 어제 손님 맞느라 무리했더니 병났어요”라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조 씨는 소주잔 대신 글라스에 소주를 가득 따라 마시곤 했는데 단 두 번에 걸쳐 ‘원샷’을 하는 독특한 습관을 갖고 있었다. 그는 술을 매우 급하게 마시는 편이었다. 몇 달 전 시내의 한 음식점에서 가진 저녁식사에서 조 씨와 기자는 불과 한 시간 동안 갈빗살 6인분에 소주 다섯 병을 나눠 마시고 헤어진 적도 있다.
“어서 드세요~” “많이 좀 드세요!”를 연발하며 솥뚜껑만 한 손으로 고기를 굽던 조 씨.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젊은이를 능가하는 그의 왕성한 식성과 술실력이었다. 조 씨는 소공동 인근의 식당에서는 갈비탕 한 그릇을 5분 만에 뚝딱 비우기도 했다.
흔히 조폭을 비유할 때 검찰과 경찰에서 자주 쓰는 말이 ‘걸레는 빨아도 걸레’라는 말이다. 조폭의 개과천선은 믿지 않는다는 말이다. 성격상 언론 노출을 즐겼던 조 씨 역시 이런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와 관련, 언젠가 조 씨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주변에서는 성경책 끼고 다니고 찬송가 부르고 그런 모습이 언론에 나오면 쇼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고 해요. 그래서 신앙생활이든 교화활동이든 사역이든 조용히 하라고 충고하더라구요.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내가 드러내놓고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알려야 나처럼 새 삶을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지지 않겠어요? 솔직히 누릴 것 다 누려봤고 가만있어도 먹고 살 만합니다. 이 나이에 거짓으로 이 짓 하라고 해도 못해요.”
생전에 조 씨는 조직세계의 동향에 대해 정보를 제공해주는가 하면, 아우들을 향해 거침없이 쓴소리를 하기도 했다. “이제는 조직도 변해야 한다. 배워야 되고 합법적인 사업을 해야 한다. 더 이상 사회에 기생해서 해악을 끼치는 존재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 조 씨의 지론이었다. 실제로 조 씨는 석사 출신의 엘리트 아우를 소개하며 흐뭇해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종교생활과 관련, 여러 가지 야심찬 구상을 하던 모습이다. 조 씨는 화끈한 성격답게 늦은 나이에 시작한 신앙생활도 화끈하게 했다. 그리고 자신의 ‘기도제목’에 대해 상당히 진지하게 얘기했다. 능숙하게 성경구절을 찾고 암송하며 찬송가를 부르던 그의 모습은 ‘신앙인 조일환’에 대한 의구심을 사라지게 했다. 조 씨는 유달리 전도에 큰 열의를 보였다. “교도소에 있는 아우들만 해도 1만 5000명이에요. 이들이 일차적인 전도대상이죠. 쉽진 않겠지만 불가능하다고는 생각 안 해요”라고 말하며 자신감을 보이기도 했다.
조 씨의 ‘갑작스런’ 사망에 가족과 측근들이 아쉬워하는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조 씨의 측근은 이렇게 말했다.
“어둠의 세계에 몸담았다는 이유로 고인은 세상의 지독한 편견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뒤늦게나마 ‘정말 조일환은 다르구나’라는 모범을 보이기 위해 애를 썼는데 너무 허무하게 떠났어요. 할 일이 너무 많은 분인데….”
조 씨에 대한 평가는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를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인정하고 참회했다는 것이고 다시 어둠의 길로 빠지는 어리석은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