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으로 출국한 한상률 전 국세청장의 행방이 묘연하다. | ||
한 전 청장의 영향력이 새삼 거론되는 지금 한 전 청장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태광실업 세무조사가 ‘게이트’로 확대되면서 돌연 미국으로 떠나 ‘도피성 출국’이라는 의혹을 샀던 한 전 청장은 출국한 지 5개월이 지났지만 깜깜 무소식이다.
노무현 정권 하에서 국세청장에 임명된 한상률 전 청장은 현 정권의 신임을 받기 위해 각종 기획세무조사를 했고 태광실업 세무조사도 이런 기획조사의 연장선상에 있었다는 게 현재까지의 정설이다.
그는 세무조사 결과를 토대로 박연차 전 회장을 검찰에 고발했고 이는 곧 ‘박연차 게이트’로 확대되는 시발점이 됐다. 이를 통해 그는 현 정권의 재신임을 받는 듯했으나 ‘그림로비’ 사건이 터지면서 옷을 벗었다.
청장직에서 물러나면서 세간의 관심 밖으로 벗어나 있던 그가 다시금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한 것은 박 전 회장에 대한 검찰 수사가 정치적 시비에 휘말리면서부터다. 당시 검찰은 국세청의 고발에 대해서만 수사할 뿐이라며 책임을 국세청에 전가하는 듯한 인상을 남겼다. 결국 국세청이 실시한 태광실업 세무조사와 관련한 각종 의혹들이 제기됐다. 여기에는 이명박 대통령과 한 전 청장의 독대 의혹, 이상득 의원과 천신일 세중나모여행 회장의 박 전 회장 구명로비 의혹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 한 전 청장은 이미 한국을 떠난 뒤였다. 이때가 3월 16일이었다. 명목상으로는 3~5년 과정으로 공부를 하기 위해 뉴욕주립대 공공행정학과에 방문 연구원 자격으로 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정치권에서는 정권 차원에서 계획된 도피성 출국이라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후 박 전 회장에 대한 천신일 회장의 구명로비 의혹이 불거졌을 때 한 전 청장을 소환조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검찰은 서면조사하는 선에서 그에 대한 조사를 마무리했다.
그는 지난 4월 모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자신과 관련한 여러 의혹들을 전면 부인했다. 한 전 청장의 소식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한 달 뒤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한 이후 국세청과 한 전 청장의 책임론이 더욱 크게 불거지자 그는 사실상 잠적했다. 현재 박연차 게이트 수사는 검찰 손을 떠나 법원에서 재판 중이며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정국도 마무리됐다. 하지만 박연차 게이트와 관련한 모든 사건의 키를 쥐고 있는 그의 행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기자는 한 전 청장의 근황을 알아보기 위해 두 달에 걸쳐 몇 차례 일산에 있는 한 전 청장의 집에 들렀다. 하지만 한 전 청장의 가족을 포함해 누구도 만날 수 없었다. 전화를 해도 서너 살 정도로 추측되는 어린 아이가 한두 차례 받았을 뿐 다른 누구와도 통화하지 못했다. 국세청 몇몇 직원들에게도 그의 근황에 대해 물어봤으나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중 한 현지 교포에게 ‘한 전 청장이 한국에 귀국하고 싶어한다’는 얘기를 접했다. 한 전 청장이 ‘세무조사를 해서 검찰에 고발한 것이 잘한 일이지 잘못한 일은 아니지 않느냐’며 ‘내가 왜 죄인처럼 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미국에 머물고 있어야 하냐’는 뉘앙스의 말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한동안 기자들과 숨바꼭질하듯 거처를 옮겨다녔던 것으로 전해진다. 처음 출국했을 때는 뉴욕에 있었으나 한때는 LA에서도 그를 봤다는 얘기도 나왔다. 이 말들이 사실이라면 그는 머나먼 이국땅에서 지리한 도피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한 전 청장을 잘 아는 국세청 인사들은 기자가 접한 소식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입을 모은다. 한 전 청장이 자발적으로 가까운 시일 안에 귀국할 가능성은 낮다는 것이다.
국세청의 한 관계자는 “(한 전 청장은) 머리가 비상한 사람이다. 절대 귀국하지 않을 것이다. 설사 누군가가 그의 귀국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해도 움직일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철저히 자신의 이해관계에만 따라서 움직인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그가 자발적으로 귀국한다 해도 그 시점이 지금은 아니라는 것은 본인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라며 “몇 년간은 귀국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두 정권에 걸쳐 권력기관의 수장으로 일하며 기세등등했던 한상률 전 국세청장. 그는 공부를 하기 위해서 미국으로 떠났다면 왜 단 한 번도 한국에 오지 않고 숨어지내듯 이국땅에 머물고 있는 것일까. 또한 현 정부가 그의 귀국을 원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박혁진 기자 ph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