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와중에 국내 굴지의 한 기업에서 얼마 전 실용적인 조기경보시스템을 도입해 수천억 원대의 기술 유출 피해를 막았다는 소식은 이제 우리 기업에도 보안의식이 싹트는 것 같아 반갑기까지 하다.
얼마 전 현대자동차는 지난해 도입한 ‘조기경보시스템’ 덕을 톡톡히 봤다. 수천억 원에 이르는 기술이 고스란히 외부에 유출됐지만 조기에 범인을 잡은 덕에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던 것.
기술이 유출된 것은 현대차의 남양연구소. 지난 7월 31일 현대차 남양연구소의 연비개발팀에 근무하던 천 아무개 씨(43)는 2007년부터 올 7월까지 현대자동차의 엔진전자제어 데이터를 자동차 정비업체 P 사 대표에게 유출한 혐의로 검찰에 구속됐다.
천 씨는 현대차의 엔진 관련 데이터를 손 씨에게 유출하고 그 대가로 5000만 원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손 씨는 이렇게 입수한 기술을 2007년 9월부터 지난달 9월까지 고객들의 자동차를 튜닝하는 데 사용했다.
또한 천 씨는 전 동료였던 황 아무개 씨와 공모해 ISG 기술을 유출한 혐의도 받고 있다. 다른 튜닝카업체 대표인 이 아무개 씨(43·L 사 대표)에게 ISG 기술을 유출하고 그 대가로 수천만 원 상당의 금품을 받았다는 것. ISG 기술은 차량이 정차하면 엔진을 자동으로 멈추게 해 연료 소모를 줄일 수 있는 최첨단기술이다.
현대차에서는 천 씨가 유출한 기술의 가치를 1000억여 원대로 평가하고 있다. 불행 중 다행인 점은 현대차 측이 지난해 도입한 ‘조기경보시스템’ 덕분에 천 씨를 조기에 검거할 수 있었고 피해도 최소화됐다는 것이다.
조기경보시스템은 회사 자료를 외장하드에 받을 경우 직원이 내려받은 파일 내역이 기록되는 보안시스템이다. 현대차는 이 시스템을 2008년 하반기부터 도입했다. 천 씨는 이를 모르고 2007년부터 세 차례에 걸쳐 기술을 유출하다 결국 꼬리를 밟히고 말았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조기경보 등 기술 유출을 막기 위한 시스템을 도입하는 데 드는 비용은 어지간한 기업에게도 큰 부담이 될 만큼 적지 않은 금액이라고 한다. 현대차의 경우에도 100억 원 가까이 투입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현대차의 사례처럼 최근 대기업들을 중심으로 보안시스템을 도입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LG CNS는 지난달 25일부터 정보 보호를 위해 ‘서버 기반 컴퓨팅’을 도입했다. 서버 기반 컴퓨팅이 구축되면 임직원들은 개인 PC로는 단순히 부팅만 한 후 네트워크를 통해 서버로 들어가 모든 업무를 진행하게 된다. 때문에 외장하드 등을 이용해 자료를 다운받거나 메일로 기밀을 유출할 경우 회사 측에서 이를 곧바로 파악할 수 있다.
이 시스템 구축에도 거액이 들었다. LG CNS 측에서는 약 150억 원을 투자했다고 밝혔다. 사측은 “비록 보안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큰돈이 들긴 하지만 IT 업계에서 정보가 외부로 샜을 경우 그 피해액이 엄청나기 때문에 그만 한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한편 보안시스템의 도입을 차일피일 미루다 크게 낭패를 본 사례도 적지 않다. 특히 이런 사례는 자금의 여유가 있는 대기업보다는 중소기업들에게 많다. 수천억 대의 가치가 있는 기술을 독보적으로 보유한 기업일지라도 당장의 자금난 때문에 큰돈을 들여 보안시스템을 구축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달 경남지역의 한 중소기업은 업계 추산으로 수천억 원대에 달하는 기술이 외부로 유출되는 피해를 입었다.
경남경찰청 외사과는 지난달 18일 자신이 일하던 중소기업체의 방위산업 첨단도금기술을 빼돌린 혐의로 강 아무개 씨(48) 등 직원 4명을 구속하고 기술을 빼돌리도록 사주한 경쟁 회사 대표 김 아무개 씨(60)를 같은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
강 씨는 2007년 11월 경쟁 회사 대표인 김 씨로부터 고액의 연봉을 제의받고 K 사 사무실에서 ‘금속표면처리 공정지침서’ 등 100여 개의 파일을 USB 메모리에 저장해 퇴사한 뒤 김 씨의 회사로 넘긴 혐의를 받고 있다.
또 강 씨의 직장 동료였던 정 씨(45)는 같은 해 10월, 회사 사무실에서 표면처리 공정과 관련된 산업기술 자료 2240여 개 파일을 USB 메모리에 저장해 강 씨에게 넘겨줬다.
이외에 K 사 직원 두 명은 지난해 1월 외장형 하드디스크에 K 사에서 개발한 특수 표면처리 산업기술 자료와 차세대 전차의 국방대구경 포신 크롬도금 공정 등 기술자료 8만여 개를 빼내 외부로 유출했다.
실제로 K 사가 입은 피해액은 540여억 원. 경찰에 따르면 국방대구경 포신 크롬도금 공정기술은 스위스의 하트크롬 사와 K 사 두 곳만이 원천기술을 보유, 수입 대체 및 역수출 효과를 산정하면 그 경제적 가치는 무려 3000억 원대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앞서 지난달 7일에는 KIST의 독보적인 기술인 금속표면처리기술 장비 도면을 노트북으로 반입해 통째로 중국 기업에 팔아넘기려던 일당이 검거되기도 했다. 또 지난달 14일에는 I 사의 반도체장비 핵심부품의 제조기술 자료를 USB로 유출한 일당이 검찰에 체포됐다.
이들 업체에서 유출된 기술들은 모두 1000억 원 이상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KIST 기술유출 건을 수사한 수원지검 첨단범죄수사과의 관계자는 “애국심에 호소해 기술유출을 막는 시대는 지났다”며 “자체적인 보안시스템 도입 등이 없이는 기술유출을 막을 수 없다. 더 큰 피해를 보기 전에 우리 기업들의 보안의식이 강화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장환 기자 hwan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