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서울 압구정동 신현대아파트에서 열린 분신 경비원 A 씨의 노제. 작은 사진은 입구에서 바라본 신현대아파트.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지난 11월 27일 신현대아파트에서 마주한 경비원 A 씨는 해고 예고 통보를 받은 뒤 막막한 심정을 드러냈다. A 씨는 “이 씨 장례식 끝나고 나서 얼마 후에 여기 사람들 다 해고 예고 통지서를 받았다. 일주일쯤 됐다”며 “입주자 대표자들은 우리를 고용한 회사 측하고 얘기하라고 하는데, 고용업체(한국주택시설관리)도 우리에게 해고 통보를 했다. 말할 곳이 없어 주민들한테 탄원서 받으러 다니니까 그것도 하지 말라고 관리사무소에서 방송까지 했다”고 토로했다.
이어 A 씨는 “올해 초만 해도 정년(신현대아파트의 경우 63세) 넘은 사람만 해고한다고 공지했었다. 이게 이 씨 분신사건이 일어나면서 얘기가 바뀐 것이다. 입주자 대표들은 오래 됐으니까 업체를 바꾼다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언론에서 시끌벅적하니까 아파트 이미지도 있고 그냥 정리하겠다는 것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신현대아파트 입주자 대표회의가 아파트 관리업체인 한국주택시설관리와 연장계약을 하지 않기로 의결한 시점은 지난 11월 5일로 알려졌다. 이날은 아파트 주차장에서 분신을 한 이 씨가 사망하기 이틀 전이었다. 이 씨의 동료 경비원들은 이 씨가 사망한 11월 7일까지도 이 같은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이 씨의 장례식이 끝난 11월 10일, 신현대아파트 경비원들은 입주민 게시판 공고를 통해 자신들을 고용한 한국주택시설관리 측이 아파트 측과 계약을 하지 않기로 한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해고가 현실화된 것은 그로부터 열흘 뒤였다. 지난 11월 19일과 20일 양일간, 신현대아파트 경비원들은 해고 예고 통지서에 서명하라는 통보를 받은 것이다.
현재 해고통보를 받은 경비노동자는 경비원 78명과 관리직 5명, 보일러·전기 기술직 등 23명을 포함해 총 106명에 이른다. 매년 정년이 된 경비노동자가 해고 예고 통보를 받은 적은 있었지만 이번과 같은 전원 해고 통지는 유례없는 일이다. ‘보복성 해고’ 논란이 일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신현대아파트 경비원 대표 김인준 씨(60)는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입주자 대표자 측은 우리 경비 노동자들을 대화상대로 생각하지 않는다. ‘아직 결정된 것이 없다’며 ‘고용업체 측과 얘기하겠다’고 했다. 지금 입주자 대표와 협상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고용업체 직원밖에 없다. 그런데 협상에 임하는 직원도 어떻게 될 것인지 잘 모르겠다고 하고 있다. 이제 계약 만료까지 한 달 남았는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이어 김 씨는 “여기가 정년이 63세였다. 그마저도 지금 60세로 줄이겠다고 하고 있다. 주변의 다른 아파트는 65~70세 정도 된다. 내년부터 경비원도 최저임금을 보장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받고 있는 월급에서 더 안 받을 테니까 63세 정년까지만 일하게 해달라고 했다.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협상의 진전이 안 되고 있다. 아직 결정된 것이 없다고 하는데 이미 내부에서는 다 결정된 분위기로 받아들이고 있다. 지금 외부에서도 논란이 되니까 회사 측과 입주민 대표 측이 아직 결정된 것이 없다고 입장을 바꾼 것 같다”고 말했다.
보복성 해고 논란이 불거지자 아파트 측은 “해고 예고 통보는 재계약 때마다 있어왔던 일”이라고 잘라 말했다. 신현대아파트 관리사무소의 한 관계자는 “입주자 대표회의가 고용업체와 재계약을 하지 않겠다고 게시판에 공개한 것은 사실이지만 회의에서 나온 의결내용을 공개한 것일 뿐”이라며 “해고가 확정된 것도 아니다. 새로운 업체 선정을 한 것도 아니고 주민들의 의견을 모아야 하는 과정도 있다”고 말했다. 고용업체인 한국주택시설관리 측도 “현재 진행 중인 사안이라 말씀드릴 것이 없다. 내년 초쯤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원론적인 입장만 반복했다.
신현대아파트 경비노동자 68명이 회원으로 속해 있는 민주노총 서울일반노조는 입주자대표회의의 결정이 경비원 분신사건 등으로 아파트 이미지를 실추시킨 것에 대한 보복성 해고로 판단하고 있다. 김선기 대외협력국장은 “경비업체와 입주민 대표들은 확정적인 해고 의지가 없다고 해명하고 있다. 하지만 해고통보는 곧 해고로 현실화될 우려가 크다”며 “1983년 이 아파트가 생긴 이래 한 번도 바뀌지 않았던 경비업체를 이 시점에서 교체한다는 것은 보복성 해고라고밖에 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격무와 고용불안에 시달리며 매일같이 ‘참을 인’자를 새겨왔다는 신현대아파트 경비원들은 누구보다 혹독한 겨울을 보낼 채비를 하고 있다. 신현대아파트 경비원 대표 김인준 씨는 “정말로 시위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내가 아파트 옥상에 올라갈까봐 관리소 측에서 문까지 다 걸어 잠가놓았다. 그저 우리는 최소한의 대접을 받으며 일을 하고 싶을 뿐이다”라며 “분신사건 이후 오히려 미안함과 고마움을 표하는 주민들도 많다. 입주민들이 우리의 얘기를 꼭 들어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취재가 끝날 무렵 신현대아파트 경비원들이 파업을 하기로 잠정 결정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배해경 기자 ilyoh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