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남북공동성명 이듬해인 1973년 평양을 방문한 이후락 중정부장이 김일성 주석과 다시 만났다. | ||
이 씨는 지난 5월 경희대 동서신의학병원에 입원해 5개월 넘게 치료를 받았지만, 뇌종양 등 병세가 악화돼 이날 오전 11시 45분쯤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권력자였지만, 그의 말년은 불우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김형욱 차지철 김재규 등에 이어 이 씨가 사망함으로써 박정희 정권 시절 ‘공작정치’의 대명사가 됐던 권력 실세들 대부분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3공화국 시절 박정희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 통했지만 5공화국 출범 후 몰락의 길을 걸으면서 30여 년 은둔생활을 해오다 사망한 이 씨의 파란만장했던 인생역정을 되짚어 봤다.
육군 정보국 차장을 역임했던 이 씨가 권력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지난 1961년 5·16 쿠데타 직후의 일이다. 1924년 울산에서 태어나 울산공립농고를 거쳐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육군에 임관한 이 씨는 쿠데타 이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공보실장을 맡으면서 권력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이후 대통령 비서실장 자리에 올라 무소불위의 권력을 손에 쥐었다.
이 씨는 1969년 10월 ‘3선 개헌’ 후폭풍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김형욱 전 중정부장과 함께 해임돼 한때 주일 대사로 물러나기도 했다. 이 씨가 70년 주일 대사 시절 도쿄 대사관 근처 일식집에서 생선 초밥을 비행기편으로 박 전 대통령에게 공수했던 사담은 유명한 일화로 꼽히고 있다.
이 씨의 지극정성이 박 전 대통령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일까. 1970년 12월 이 씨는 제6대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되면서 다시 권력 핵심으로 부활하게 된다. 이듬해에는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총지휘하며 명실상부한 2인자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이 씨는 남북공동성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내면서 실세를 넘어 권력의 정점에 올라섰다. ‘대한민국 대북 밀사 1호’로도 불리는 그는 1972년 5월 2일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자살용 청산가리 캡슐을 몸에 감추고 3명의 수행원과 함께 판문점을 넘었다. 3박 4일간의 방북기간 중 당시 김일성 북한 주석을 두 차례 만나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을 핵심 의제로 한 역사적인 ‘7·4 남북공동성명 기본 원칙’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 뒤 72년 10월 유신 체제를 확립하는 데 앞장서면서 권력 2인자로 우뚝섰다.
하지만 이 씨는 1973년 10월 일명 ‘윤필용 사건’으로 권력무상의 비애를 맛봐야 했다. ‘윤필용 사건’은 이 씨의 심복으로 알려진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이 1973년 4월 술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노쇠했으니 물러나시게 하고 후계자는 이후락 형님이 해야 한다”는 발언을 한 것으로 드러나 촉발됐다. 당시 윤필용과 그를 따르던 하나회 후배들은 쿠데타를 모의한 죄로 같은해 10월 대거 구속됐다.
이 사건 이후 이 씨는 당시 박 전 대통령의 최대 정적으로 꼽혔던 김대중 전 대통령 납치 사건을 주도한 것으로 전해진다. ‘윤필용 사건’으로 위기감을 느낀 이 씨가 ‘김대중 납치 사건’을 주도해 박 전 대통령에게 충성심을 보이려 했을 것이란 분석에 힘이 실리기도 했다. 실제로 1998년 미국 국가안보기록보관소는 ‘1973년 비밀 외교문서’라는 자료를 통해 이 씨가 ‘김대중 납치 사건’을 주도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씨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1973년 12월 중앙정보부장직에서 물러나 영국령 바하마에서 사실상 망명생활을 하게 된다. 이 씨는 ‘오뚝이’란 별명답게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때 자신의 고향인 울산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돼 재기를 노렸지만 과거의 영화를 되살리진 못했다.
이 씨의 말년 삶은 불우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 전 대통령이 암살되고 신군부에 의한 제5공화국이 출범하자 권력형 부정 축재자로 몰리면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당시 재산과 관련해 “떡(정치자금)을 만지다보면 떡고물(부스러기 돈)이 묻는 것 아니냐”는 발언으로 한때 ‘떡고물’ 유행어를 퍼트리기도 했다. 당시 신군부의 추정에 따르면 그의 재산은 194억 원에 달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 씨는 1985년 정치활동 규제에서 풀려났지만 정계를 떠나 경기도 하남에서 도자기를 구우며 최근까지 은둔생활을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하남 자택과 땅은 보험사 대출금을 갚지 못해 99년 8월 경매 처분됐고, 경기도 광주에 있던 도자기 요장과 땅도 94년 매각됐다.
2004년 부인이 별세한 뒤에는 치매증상까지 보였다. 지난 5월 병원에 입원해 170여 일 동안 치료를 받던 이 씨는 뇌종양과 노환 등으로 병세가 악화돼 10월 31일 결국 생을 마감했다. 그의 유골은 11월 2일 대전 유성구 갑동 국립대전현충원 장군 제2묘역에 안장됐다.
끝내 묻힌 3공 비사 <일요신문>이 본 이후락
2003년 마실 가는 '백발 노인'
▲ 2003년 3월 26일 하남 자택을 나서는 이후락 전 중정부장의 모습이 일요신문 카메라에 포착됐다. 백발이 성성한 데다 얼굴에 검버섯까지 피어 몰라보게 노쇠한 모습이었다. | ||
<일요신문>은 또 지난 2003년 3월경에 이 씨의 노쇠한 모습을 담은 사진을 특종으로 보도하기도 했다. 이 씨가 단골 음식점인 ‘한우리’를 찾는 모습이었다. 당시 이 씨는 건강악화설이 돌고 있는 상황이었다. <일요신문>은 “치매 소문과는 달리 겉보기에 멀쩡해 보였다”며 94년 이후 처음으로 이 씨의 근황을 단독으로 공개해 큰 관심을 끌었다.
이외에도 <일요신문>은 3공 시절 숱한 비화의 ‘키맨’으로 지목받았던 이 씨의 입을 열기 위한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정인숙 씨 사망사건’ ‘김형욱 전 중정부장 실종사건’ ‘김대중 납치사건’ 등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는 사건들의 진실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이 씨와 여러 차례 접촉했다.
김장환 기자 hwan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