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미인도> | ||
체위에 관한 처녀들의 수다. 얼마 전 원 나이트 스탠드에서 영화 <색, 계>의 아크로바틱 섹스에 버금가는 화려한 체위를 경험한 A의 흥미진진한 섹스담을 들었다. “나는 내 몸이 그렇게 유연한 지 처음 깨달았어.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 보니 내 허리가 뒤로 꺾어져 있는 거야. 그가 내 다리를 내 머리 뒤로 넘기는 줄 알았다니까. 참 신기한 게 이 모든 것이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루어졌다는 거지. 흥미진진하더라. 점수를 주자면 80점? 체위를 즐기느라 막상 오르가슴을 느낄 틈이 없더라고”라고 말했던 것. A의 섹스담을 시작으로 우리는 저마다 ‘내 인생 최고의 체위’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난 뭐니뭐니해도 69체위. 그가 신음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나도 즐길 수 있으니까, 일석이조지” “난 마주보고 앉은 상태에서 섹스하는 게 가장 좋더라. 그가 내 안으로 들어왔다 나가는 게 보이는 체위잖아. 어쩐지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더 흥분이 돼” “난 얼마 전에 모텔에 갔다가 러브 체어에 앉아봤는데, 아, 그거 괜찮더라. 삽입 각도가 자유자재로 조절이 되는 게 와, 평소엔 그의 페니스가 작은 줄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봐. 내가 문제였지. 그날 이후 나는 내가 능동적으로 움직이면 얼마나 즐거울 수 있는지 새삼 깨달았잖아” 등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B가 그야말로 B사감 같은 말로 우리의 속물 같은 솔직한 대화에 찬물을 끼얹었다. “남자들이 아무리 난리를 쳐도 오르가슴은 정상위가 최고 아니야? 일단 서로 눈을 마주볼 수 있잖아. 밀착감도 가장 강하고. 솔직히 남자들은 여자에게 익숙해질수록 섹스할 때에 서로 눈을 마주치는 법이 거의 없어. 그런데 로맨스는 없어지고 에로스만 남는 섹스는 별로이지 않아? 나는 오르가슴을 추구하는 섹스일수록 만족감이 떨어지더라”라고 얘기했던 것. B는 우리의 가벼운 체위 토크를 섹스관, 사랑관이라는 담론으로 발전시켰다. 하지만 A를 비롯한 누구도 B의 말에 반기를 들 수 없었다. 정상위만큼 여자를 행복하게 만드는 체위는 없으니까 말이다.
카마수트라, 소녀경, 탄트라 등을 보면서 체위를 연구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남자들이 <플레이보이>나 <선데이 서울>을 보는 동안 여자도 영화 <나인 하프 위크> <베티 블루> <오리지날 신> 등 파격적인 베드신이 나오는 성인 영화를 보면서 은근히 체위 연구를 하곤 한다. 나 역시 지난해 <미인도>를 보면서 조선시대 기생이 청나라 춘화집을 재연하는 장면을 흉내 내 본 적이 있다. <색, 계>가 개봉했을 때에 응급실에 실려 온 남녀가 많았다는 뉴스를 보면, 영화를 보고 실습하는 이가 나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체위를 실현시키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그는 양조위가 아니고, 나 역시 탕웨이가 아닌 것을. 다만 내가 영화 속 체위를 시도하는 것은, 다양한 체위를 시도하는 그 과정을 즐기기 위해서다. 그에게 ‘이건 어때?’라고 자연스럽게 물어볼 수 있는 계기가 되고, 그 역시 지루해진 섹스에 새로운 활력소를 갖게 되니까.
그런데 새로운 시도에도 일방통행은 곤란하다. 가끔 어떤 남자들은 여자에게 “나만 따라와” 혹은 “내가 죽여줄게”라고 말하면서 여자가 감당하기 힘든 자세를 요구할 때가 있다. ‘싫다’는 데도 ‘에이, 좋을거야’라고 말하면서 억지를 부리는 것. A가 말했다. “처음에는 그가 ‘이렇게 해봐’ ‘저렇게 해봐’ 이러면서 새로운 체위를 시도하는 게 재미있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그의 섹스돌이 된 기분이 들더라. 그가 나를 만족시키려는 건지, 아니면 내가 그의 도구가 된 건지 감이 안 잡히더라고. 게다가 그는 후배위, 다리 들어올리기 등 서로 눈을 볼 수 없는 상태에서의 체위를 즐기더라고.” 나 역시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아직 과감한 섹스를 즐기지 못하던 20대에 만난 그는 나에게 69체위의 즐거움을 가르쳐주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나는 후배위, 69체위가 참으로 싫었다. B의 말대로 로맨스가 없는 체위였기 때문이다.
여자에게 체위의 분류기준은 오르가슴보다 로맨스일 때가 많다. 아무리 오르가슴이 쉽게 오는 체위라도 로맨스가 없는 체위라면 여자는 충분한 만족감을 얻기 힘들기 때문이다. 물론 연애 초기에 열정이 불타오르는 커플이라면 로맨스가 ‘만땅’으로 충전돼 있으니 로맨스가 있는 체위를 고집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오랜 연애와 동거 생활로 지쳐있는 커플일수록 로맨스가 있는 체위여야 여자의 만족감이 커진다.
오랜만에 그녀와의 섹스를 후배위-여성상위 등 변주를 하지 않고 정상위만으로 해보는 건 어떨지? 섹스를 하는 내내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시키면서 말이다. 오랜만에 여자의 다리를 활짝 벌리면서 그녀와 그녀의 그곳을 바라보면서 즐기는 섹스도 괜찮지 않을까?
박훈희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