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홍길동의 후예> | ||
며칠 전 벌어진 한밤의 해프닝. 최근 나는 ‘나쁜 여자’가 되었다. 마치 원 나이트 스탠드를 할 것처럼 남자를 유혹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어머! 저 그런 여자 아니에요”라는 말을 해버린 것이다. 선수 생활 10년 만에 어찌 이런 일이? 사연은 이렇다. 남자 두 명, 여자 두 명이 모인 술자리에서 나는 한 남자를 콕 집어 공략했다. 그의 닉네임은 ‘오지호’. 배우 오지호를 닮은 남자였다. “제 옆에 앉으세요” “잘 생겨서 인기도 많으시겠다” “여자친구가 없다고요? 말도 안 돼! 눈이 높으신가보다” “자, 러브샷!” 등의 뻔한 유혹 멘트를 날리면서 그에게 작업을 걸었던 것. 남자1과 여자1이 동시에 화장실에 가고 노래방에 둘만 남게 되었을 때만 해도 분위기가 좋았다. 나는 <생활의 발견>의 예지원처럼 “우리, 어색한데 뽀뽀나 할까요?”라고 말했고, 그는 내게 가볍게 키스했으니까. 곧이어 그는 과감하게 내 티셔츠 안으로 손을 넣어 가슴을 조몰락거렸고, 난 술에 취한 척 그에게 안겼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내가 굴러들어온 원 나이트 스탠드 상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들이대는 여자를 오랜만에 만났을 테니, 얼마나 좋았겠나. 나 역시 ‘오늘 밤, 이 남자와 잘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모텔로 가기 전 마지막 순간에 어이없는 실수를 했다. 두 사람을 집으로 보낸 후, 그가 두 손을 점퍼에 집어넣고 짝 다리를 짚고 서서는 “오늘 나랑 같이 있고 싶어?”라고 물었던 것. ‘너, 내가 그렇게 좋니?’라는 말투로 말이다. 아마 그는 내가 자신에게 반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 순간 나는 술이 확 깼다. 그리고 싱긋 웃으면서 “나, 먼저 집에 갈게”라며 택시를 잡았다. 백미러에 당황한 표정으로 택시 안의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가 보였다. 들인 공이 아까웠지만, 고소했다. 내가 그에게 한눈에 반한 거 아니었냐고? 물론 아니었다. 그런데 왜 그리 들이댔냐고? 그저 그날 나는 외로웠고, 마침 그가 내 옆에 있었으니, 나는 그를 유혹한 것뿐이었다. 그가 오지호를 닮지 않았더라도 나는 그에게 작업을 걸었을 것이다. 그가 나에게 완전히 넘어올 때까지 최선을 다해서 말이다. 만약 그가 말없이 나를 홍대 앞 어느 모텔로 인도했더라면, 아마도 그는 마지막까지 황제 대접을 받으며 나와의 밤을 즐겼을지도 모른다.
1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상해 출장에서 만난 대학동창 A와의 해프닝. 평소엔 ‘찌질남’이라고 생각했던 A도 낯선 곳에서 마주치니 새삼스럽게 멋져 보였다. 갑자기 ‘이대로 돌아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신속하게 항공사에 전화를 해 서울로 돌아가는 날짜를 늦추었다. 그때 A는 나를 ‘낚은 고기’로 여겼나보다. 호텔로 자리를 옮긴 A는 짧은 애무 후 내 입에 페니스부터 들이밀었다. 이기적인 섹스를 시작한 것이었다. 그 순간 나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아, 너랑은 도저히 안 되겠다. 우리 그냥 술 마시자”라고 말해버렸다. 내 돌발적인 변화에 당황한 A는 “어? 어어. 그래”라면서 팬티를 주워 입고 다시 술을 마셨지만, 그는 이미 흥분해있었다. 술을 마시는 내내 어떻게든 나를 유혹해서 한 번 자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나는 그날 밤 A와 자지 않았다. 자만심에 가득 찬 그가 너무나 얄미웠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에 대한 내 기분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날 밤 A와의 섹스가 즐겁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나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오지호’도, A도 좋아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저 원 나이트 스탠드에 이르는 흥분의 무드를 만들기 위해서 그들을 ‘이 여자는 나에게 빠졌어’라는 착각에 빠뜨렸던 것이다. 그러니 그들이 자만에 빠져 실수를 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런데 이렇게 남자의 기분을 북돋우는 것이 나만의 스킬이겠나. 상당수의 여자가 진심과 상관없이 남자를 착각에 빠뜨린다. “오늘 한번 할까?”라는 말 대신, “네가 너무 좋아”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남자가 자만에 빠져 섹스에 불성실을 예고하면, 여자는 “그런 거라면 안 할래”가 될 수밖에.
진짜 선수는 여자를 유혹할 때 마지막 순간까지 배려를 멈추지 않는다. 여자가 아무리 ‘낚인 고기’ 연기를 해도, 선수라면 여자가 “그만!”이라고 외칠 때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 아니, “그만!”이라고 외친다 해도 좀 더 노력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 역시 남자를 북돋우기 위한 가짜 오르가슴일 수 있으니 말이다.
박훈희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