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이터/뉴시스 | ||
실제로 세계의 존경을 받는 인권운동가, 남아프리카의 흑백화합을 이끈 유능한 정치지도자로 잘 알려진 만델라는 알고 보면 스포츠와 올림픽운동에 대해 해박하고, 또 그 발전을 위해 노력한 스포츠 지도자이기도 하다. 예컨대 만델라는 영화에 나온 것처럼 백인의 스포츠인 럭비를 통해, 그리고 올림픽 출전과 올림픽 유치활동을 통해 남아공의 흑백화합과 세계평화의 메시지를 이끌어냈다.
내가 처음 만델라를 만난 것은 1990년 그가 석방된 직후였다(영화 첫 머리에도 나온다). 만델라는 흑인 인권운동 즉, 반 아파르트헤이트 운동을 지도하다 1962년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로벤 아일랜드에서 27년간 수감생활을 했다. 첫 만남에서 그는 긴 수감생활 탓인지 다소 초췌하고, 안색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키가 크고, 호리호리하면서도 ‘거인’다운 무게가 느껴졌다.
그때 남아공은 인종차별 정책으로 인해 국제사회에서 지탄과 기피의 대상이었다. IOC에서도 축출된 상태로 아무 것도 못하고 있었다.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서 뉴질랜드 럭비팀이 남아공화국과 럭비 교환경기를 했다는 이유로 아프리카 36개국이 몬트리올올림픽을 보이콧, 전부 철수한 예를 보아도 이런 분위기를 쉽게 알 수 있다. 당시 보이콧은 콩고의 강가(Ganga) 위원이 주도했다. 나도 KOC 부위원장 겸 명예총무로서 김택수 KOC 위원장과 함께 60명의 한국선수단을 이끌고 몬트리올에 가 있었다. 이때만 해도 국제회의에 가면 남아공화국, 중국 그리고 남북한이 늘 주목대상이었다.
88 서울올림픽을 준비하면서 여러 가지 정치외교문제에 얽히게 되었는데 역시 남아공화국 NOC의 올림픽 복귀, 그리고 남아공 선수들의 올림픽 참가 문제가 IOC의 골칫거리였다.
IOC는 남아공의 인종차별정책으로 인해 그들의 올림픽 참가를 허락할 수도 없고, 또 올림픽의 원칙 중의 하나인 ‘탈(脫) 정치’로 인해 끝까지 남아공을 배제할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져 고민하고 있었다. 그래서 물밑에서 남아공의 흑백 양측 대표들과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 바 있다.
결국 남아공의 올림픽 참가는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도 해결하지 못했다. 그때 남아공에 대한 분위기가 어느 정도로 나빴는지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당시 남아공화국에서 한국으로 로비스트가 한 명 왔는데 유명한 기피 인물이었다. IOC본부호텔인 신라호텔 로비에 그 로비스트가 나타났다는 정보가 들어오자, 사마란치 IOC 위원장이 나보고 당장 추방하라는 지시를 내렸을 정도다.
1990년 석방된 직후 만델라는 사마란치 IOC 위원장의 초청으로 스위스 몽트뢰(Montreux)에 있는 병원식 호텔에서 요양을 하고 있었다. 그때 사마란치 위원장과 함께 호텔에서 만델라와 함께 저녁식사를 함께했다. 그 후 다시 몽트뢰의 그 호텔에 들렀을 때 레만(Lehman)호 변을 매일 만델라가 경호원을 데리고 산책을 했다는 말을 들었다. 아마도 거기서 인종문제 해소, 남아공화국의 국제사회 복귀, 자신의 정치활동 등을 구상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직접 만나본 만델라는 그렇게 오래 옥중생활을 했음에도 은은한 미소와 온화한 품격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1994년 대선에서 가장 중요한 선거전략으로 썼다는 특유의 ‘선한 웃음’은 정말이지 직접 만나보지 않은 사람은 실감하기 어려울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그는 사마란치와 내게 남아공의 비전과 남아공 선수들의 올림픽 참가, 그리고 남아공NOC의 IOC 복귀를 열정적으로 토해냈다. 그 후 사마란치는 IOC조사단을 파견, 남아공의 흑백지도자들과 협의해 흑백선수가 공히 바르셀로나올림픽에 참가하도록 했다. 이때 IOC에서는 음바예(Mbaye) 부위원장(세네갈)이, 남아공에서는 지금의 IOC 집행위원인 샘 람사미(Sam Ramsamy)가 실무를 맡았다. 물론 큰 문제의 해결에는 만델라의 의사가 절대적이었다.
만델라는 인종차별 철폐운동에 전념하면서 집권을 준비하고 있던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 특별 내빈으로 초청됐다. 당시 같은 버스에 타고 행사장에 다니며 많은 얘기를 나눴다. 그리고 1994년 만델라가 남아공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에는 요하네스버그의 대통령 집무실에서 미팅을 가졌고, 1995년과 2001년 두 차례 만델라의 방한 때도 반갑게 해후한 바 있다.
▲ 사진 위부터 아래로 97년 당시 만델라 대통령과 악수하는 필자, 99년 제109차 서울IOC총회 전경, IOC 환영 만찬에서 필자, 사마란치 위원장, 만델라 대통령이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 97년 만델라 전 대통령과 필자부부의 기념촬영 사진. | ||
만델라의 장점은 상대방의 생각을 다 들은 후 차분히 설득한다는 점이다. 만델라는 자신이 긴 수감생활 중에 동료 죄수는 물론이고, 간수들로부터도 인기가 높았는데 그 이유가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아주 잘 들어줬기 때문”이라고 그 비결을 소개하기도 했다. 이러니 미국 대통령이 와도 꿈쩍하지 않는 콧대 높은 IOC 위원들도 그를 인정한 것이다. 정말이지 만델라는 다방면에 걸쳐 박식했고, 세계의 변화를 정확히 읽고 대처해 나갔다.
만델라와 나눈 얘기들 중 자신의 리더십과 관련해서 ‘소떼를 모는 목동’의 예를 든 것이 기억에 남는다. 자신이 어린 시절 소떼를 모는 목동이었는데 “소떼는 (목동이) 앞이 아니라 뒤에 서야만 제대로 이끌 수 있다”고 표현했다. 나중에 얘기를 들으니 만델라가 대통령이 됐을 때 남아공 내에서는 그를 ‘종신 대통령’으로 삼자는 의견이 많았는데, 이를 단호히 거절한 것이 바로 만델라 본인이었다고 한다.
1994년 아내와 함께 요하네스버그의 대통령 집무실에서 만났을 때도 만델라는 국가와 국민에 대한 남다른 철학을 피력해 필자를 감동시킨 바 있다. 당시 만델라가 정권을 잡은 후 ANC 등 흑인무장단체는 백인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다. 그러나 만델라 대통령은 필자에게 “새로운 국가를 만드는 데도 시간이 부족한 지금 복수 등의 불필요한 행동에 쓸 시간이 없다고 흑인들을 설득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백인 정권 때 대통령을 지냈던 데 클레르크를 부통령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그리고 만델라는 필자에게 나라가 안정을 되찾으면서 해외로 빠져나갔던 500억 달러가 넘는 도피자산이 다시 남아공으로 돌아왔고, 피폐해진 경제는 소생하고, 범죄는 급격하게 줄었다고 덧붙였다. 이렇게 필자에게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동안에도 중간 중간 각종 사안에 대한 보고가 대통령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정말이지 관용과 화합이라는 만델라의 정치철학은 한국이 꼭 배워야 할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대립과 복수심이 만연했던 남아공화국은 급속히 안정을 되찾았으며 흑과 백은 동반자로서 하나가 되었다. 만델라는 국가를 안정시킨 후 다음 과제로 국제사회에 공헌하는 방법을 찾았다. 올림픽 유치를 위해 노력한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비록 올림픽 유치에는 실패했지만 월드컵축구 유치에 성공했고, 바로 올해 그 월드컵대회가 남아공에서 열린다(남아공 월드컵에서 한국대표팀이 뛰는 경기장 중 하나가 ‘넬슨만델라베이 스타디움’이라고 한다). 참고로 지난해 올림픽이 드디어 남미대륙의 브라질로 갔다. 브라질은 2016년 올림픽을 계기로 G20로 올라가려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남아공이 월드컵에 이어 사상 처음으로 아프리카에서의 올림픽을 치를 날도 멀지 않아 보인다. 남아공은 한국전쟁 때 UN군으로 참전했다. 개인적으로 한국전쟁 때 장교로 최전방을 누빈 까닭에 만델라의 남아공에는 특별한 정이 간다.
끝으로 만델라와 서울평화상에 얽힌 아쉬운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하고 싶다. 서울평화상은 88서울올림픽 잉여금으로 제정된 상이다. 제1회는 88서울올림픽을 성공시키는 크게 공헌한 사마란치 IOC 위원장이 수상했다. 그 후 만델라에게 서울평화상을 주자는 건의가 강하게 대두됐다. 그런데 일부에서 만델라는 노벨평화상을 받았으니 다른 사람에게 주자는 논리에도 안 맞는 주장을 펼쳤다. 전형적인 한국식 사고방식이다. 그런데 이 주장이 받아들여져 다른 사람이 받았다. 만델라가 아닌, 서울평화상을 위해서라도 당시 만델라에게 서울평화상을 주는 것이 맞았다고 생각한다.
외부로 비치는 이미지와 실제 모습이 다른 사람들이 종종 있다. 하지만 필자가 직접 친분을 쌓아본 만델라는 진정한 ‘평화와 인권의 상징’으로 부족함이 없는 ‘큰 인물’이다. 조만간 다시 만날 기회가 올 것 같은데, 다른 많은 얘기와 함께 영화를 잘 봤다는 말을 꼭 해야겠다.
김운용 전 IOC 수석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