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8월20일 강원도 모부대에서 전투기에 탑승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노무현 정권 탄생 시점부터 이어진 노 대통령과 시민단체들간의 ‘밀월 관계’는 최근 들어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는 평이다. 노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언급한 과거사 규명에 대해 시민단체가 전면에 나서 주도권을 쥘 태세를 보이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시민단체 활동은 자의든 타의든 간에 노 대통령을 도와주는 역할을 해왔다. 이 때문에 시민단체가 많은 비판을 받아온 것도 사실이지만 어쨌든 노 대통령이 야심차게 뽑아든 ‘과거사 진상 규명’ 카드의 성패 여부는 정치권력이 아닌 시민단체의 역할에 달린 상황이 됐다.
지난 15일 노 대통령의 전격 발표 이후 참여연대 민주화유족협회 등 시민단체들은 과거사 진상 규명 지지 성명을 내는 동시에 3백여 개 시민단체를 아우르는 범시민운동본부를 구성할 움직임을 보였다. 지난 대통령 선거 때와 같은 노 대통령에 대한 전폭적 지원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 해도 과거사 규명 특위 구성을 제안한 노 대통령의 ‘의지’에 대한 적극적 지원사격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과거사 조사 특위 구성’ 언급 다음날인 8월16일 신기남 열린우리당 전 의장 부친의 일본군 헌병 근무 사실에 대한 보도가 터져나오면서 과거사 규명 논쟁은 정치적 공방으로 비화됐다. 여러 인터넷 매체가 여권 수뇌부 인사들 가족의 친일행적을 다루면서 과거사 규명 주체인 여권 인사들에 대한 자질론이 촉발된 것이다.
하지만 8월17일 노 대통령은 국무회의를 주재하면서 국정원 등 국가기관의 진상규명 작업의 지휘권을 이해찬 총리에게 맡기는 모습을 보였다. 신기남 전 의장 파문이 노 대통령의 과거사 규명 추진 의지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지 않았음을 보여준 셈이다. 같은 날 문재인 시민사회수석이 기자들과 만나 “관련 사항에 대해 (시민단체가) 무제한으로 자료접근을 허용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밝혔다. 국정원 등 국가권력기관이 독점해온 주요 정보에 대한 시민단체의 접근을 공개적으로 허용하면서 과거사 규명 작업 주체로서의 지위를 확인시켜준 셈이다.
노 대통령의 시민단체에 대한 공개적 ‘호의’는 계속 이어졌다. 지난 8월25일 청와대에 국정과제회의가 신설돼 첫 회의를 가졌다. 노 대통령 직속기구로서 노 대통령의 정책 결정에 대한 자문기구 성격을 지닌 이 회의 석상에서 노 대통령은 국정운영 패러다임 연구 등을 위한 시민단체 의견 수렴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국정운영에서도 시민단체의 ‘입김’에 대한 적극 배려를 하겠다는 뜻을 천명한 셈이다.
지난 8월25일 ‘과거사 규명 작업에서 시민단체가 주도권을 쥘 것’이란 내용의 여권 내부 문건이 공개돼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과거사 규명 정국이 정치권의 정쟁 모습으로 비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시민단체 활동이 여론을 주도할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친북 용공을 과거사 규명에 포함하려는 한나라당은 고립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문건 내용의 골자였다. 여권 내에서도 이번 과거사 규명 작업의 주체가 여권이 아닌 시민단체가 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 노무현 정권 탄생 이후 고비마다 시민단체들의 ‘도움’이 있었다. 사진은 지난 3월 대통령 탄핵 반대 촛불집회. | ||
열린우리당의 다른 의원도 “경기부양 정책은 이헌재 부총리를 비롯한 경제전문가들이 장기적 계획을 세워 꾸준히 추진하는 한편 정치권에선 다시 못 올지 모르는 과거사 규명의 기회를 살려 해방 직후 반민특위가 해내지 못한 역사적 과업을 이번 정권에서 완수한다면 훗날 평가를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의 측근인 한 의원은 “노 대통령이 지금 당장 욕먹는 것에 일희일비한다면 과거사 문제를 꺼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노 대통령이 시민단체에 힘을 실어주는 것을 이런 맥락에서 보아야 할 것”이라 밝혔다.
참여연대, 의문사 진상규명 유가족대책위원회 등 3백여 개 시민단체는 ‘과거사 청산을 위한 민간공동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했다. 이 민간공동위원회는 9월3일 출범식을 가질 예정이다. 여권에서 국가기구화하기로 한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에 대해 열린우리당 원혜영 의원은 “진상조사기구의 독립성 문제는 학자와 시민단체 등 민간전문가들을 상당한 비율로 참여시켜 보완할 수 있다”고 밝혔다. 비록 과거사 규명 기구가 민간기구가 아닌 국가기구가 된다 하더라도 시민단체 연합체인 민간공동위원회의 의견이 적극 수렴될 것이란 뜻이다.
이렇듯 청와대와 여권의 암묵적 지원하에 시민단체가 과거사 규명 문제의 주도적 위치로 부상하는 것에 대한 비판론도 만만치 않다. 한나라당 임태희 대변인은 “(과거사 규명 작업을) 시민단체가 주도하는 것은 지금 환경에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밝힌다. <오마이뉴스> 김태경 기자는 진보잡지 <인물과 사상> 9월호에 게재된 ‘노 정권과 시민단체들, 유착 혹은 상생?’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시민단체는 노 대통령의 꼭두각시’라 비난해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에 대해 참여연대 이태호 정책실장은 “김태경 기자의 글은 정확한 사실에 기초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의도된 결론을 이끌어내려 한 나머지 비약과 과장, 사실검증 없는 불충분한 추론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맞받아쳤다. 노 대통령 측근으로 분류되는 열린우리당의 한 의원도 “어차피 시민단체 활동이 노무현 대통령 탄생에 큰 역할을 한 만큼 국정운영에서도 ‘유착’이 아닌 ‘공조’ 개념으로 긍정적 상생을 하면 되는 것”이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