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전우치> | ||
섹스 중 야한 말을 주고받는 커플은 많다. 남자가 여자에게 “너는 너무 쫄깃해” “맛있는 조개”라고 말했다는 에피소드는 흔한 이야기. 오랜만에 만난 친구 A는 최근 남자친구에게 “X 벌려봐”라는 충격적인 말까지 들었다나? ‘X’라니.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나는 사실 ‘X’라는 단어에 깜짝 놀랐다. 사랑하는 남녀 사이에 그토록 노골적인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경우는 거의 흔치 않다. 보통은 ‘거기’ ‘니꺼’ ‘예쁜이’ 등의 다른 말로 치환해서 얘기하지 않나. 만약 내가 A처럼 남자친구에게 ‘X’라는 말을 들었다면? 당장 헤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말을 들은 A가 굴욕감을 느끼는 동시에 성적 흥분을 느꼈다는 사실이다. A의 말은 이랬다. “평소엔 너무나 지적인 그가 섹스할 때에 그렇게 백팔십도로 돌변할 수 있다는 게 너무 흥분이 돼요. 사실 다른 남자가 그런 말을 했다면 당장 끝, 디 엔드, 바이바이죠.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의 야한 말은 용서가 되더라고요.”
A의 말을 길게 들어보니 이해가 되는 면이 있었다. A의 남자친구인 B는 섹스에 대해서는 ‘순진남’이었다. 명문대를 졸업, 엘리트 코스를 밟은 능력가 B는 배우자 후보로는 손색이 없었지만, 데이트 상대로는 그다지 재미있는 상대는 아니었던 것. “평소에 굉장히 점잖은 섹스를 즐기는 편이었어요. 섹스를 하면서 감정 표현하는 데에도 서툴렀고요. 더욱이 섹스를 자주 하는 편도 아니었거든요. 그런 사람이, 어느날, ‘X를 벌려봐’라고 노골적인 말을 툭 내뱉은 거예요. 순간 정신이 아득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지만, 그 느낌이 나쁘지만은 않았어요. ‘이게 뭐지?’ 싶은 생각도 들었고…. 재미있는 건, 그 말을 들은 순간, 갑자기 흥분이 됐다는 사실이죠. 만약 B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이었을 텐데, 지금은 그 말에 너무 흥분이 돼요”라고 말했던 것.
소극적인 남자의 섹시한 변신은 여자를 흥분시킨다. 사실 B가 원래 섹스할 때 이기적인 섹스를 했다면, 섹스에 적극적인 카사노바였다면, 섹스할 때조차 권위적인 태도로 똘똘 뭉쳐있었다면, A는 B의 ‘야한 명령’에 결코 흥분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섹스에 소극적인 애티튜드를 보이던 남자가 갑자기 색기가 뚝뚝 떨어지는 야한 말을 하니, 여자는 ‘아, 이 남자에게 내가 모르는 면이 있구나’라고 기대하지 않았겠나. 나 역시 비슷한 경험이 있다. 그는 데이트부터 섹스까지 모든 주도권을 나에게 주었던 연하남이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나를 침대 위로 거칠게 밀치더니, 내 손목을 내 머리 위로 올리고 꽉 잡은 채 애무를 시작했다. 나는 꼼짝없이 강간을 당하는 모양새로 그의 애무를 받을 수밖에. 그런데 이때의 기분이 A처럼 굴욕적이면서도 자극적이었다면? 사실이다. 내 몸을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상태로 그의 혀가 내 몸 곳곳을 훑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모처럼 그에게 강인한 남자의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그 연하남과 데이트를 할 때마다 ‘오늘은 어떤 일이 있을까?’를 기대하게 되었다.
‘마님’이라 불리는 섹스퀸 C는 섹스 중 야한 대화가 좋아서 섹스 중에 반드시 질문하는 버릇이 있다고 한다. 흔히 남자들이 묻는 것처럼 “좋아?”라고 말이다. 남자들의 대답은? 대부분 “응, 좋아”가 전부다. C의 말을 빌리자면, 대화는 이때부터 시작이다. C는 “어떻게 좋은데?”라고 구체적으로 물으면, 남자는 “지금 네 생각밖에 안나” “너는 너무 맛있어” “아아아. 너무 좋아” “대구쯤 갔어” “아무 생각이 안날 정도로 좋아” “말 시키지 마” “……, 헉헉” 등 다양한 답이 돌아오니까.
“‘말 시키지 마’라고 답하는 남자는 대부분 본능에 충실한 남자죠. ‘너무 좋다’고 답하는 남자는 로맨틱하지만 단순한 남자, ‘맛있다’고 말하는 남자는 바람둥이일 확률이 높고요. 제가 여러 야한 말을 들으면서 느낀 건데, 가장 좋았던 말은 역시 ‘사랑해’였어요.”
하하. C의 상투적인 결론, ‘사랑해’라는 말이 가장 자극적이었다는 말을 들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여자는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는 동물인가? 그렇게 ‘사랑해’라는 말이 좋은 걸까? 그 어떤 야한 말보다, 그 어떤 자극적인 테크닉보다도? 나는 씁쓸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쾌락을 즐기는 순간에도 ‘충분히 이쁨받고 싶다’는 욕망은 항상 공존하니까.
이렇듯 야한 말과 행동으로 여자를 흥분시키는 데도 꼭 지켜야 할 법칙이 있다. ‘사랑’이 내재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 ‘X 벌려’라고 말하면서도 ‘넌 너무 섹시해’라는 감정을 충분히 표현해줘야 하고, 항문을 애무하면서 ‘너의 항문까지 핫해’라고 여자를 끊임없이 부추겨 줘야 한다. ‘이 세상 누구보다도 너에게 빠졌어’라는 말이 함축되어 있을 때야말로 여자는 남자의 ‘야한 명령’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박훈희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