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007 카지노 로얄> | ||
맨발로 산과 들을 뛰어 다니던 원숭이가 어느 날 너구리가 가져온 꽃신을 신게 됐다. 폭신폭신하고 안락한 꽃신의 매력에 빠진 원숭이는 너구리를 졸라 계속해서 꽃신을 제공받았다. 처음에 무료로 꽃신을 주던 너구리는 어느 순간 돌변해 원숭이에게 꽃신 값을 요구하기 시작한다. 너구리가 요구하는 터무니없는 가격에 원숭이는 꽃신을 벗으려 했지만, 이미 말랑말랑해진 그의 발바닥은 자갈이나 바위를 걸을 때 고통을 안겨줬다. ‘울며 겨자먹기’로 너구리에게 비싼 꽃신 값을 지불하게 된 원숭이, 롤링 조직의 VIP급 대우에 취해 도박에 중독돼버린 일부 부유층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는 듯하다.
2010년을 코앞에 둔 어느 날, 부산지방경찰청에 신고가 들어왔다. 자신의 지인이 사업 차 방문한 마카오 카지노에서 도박에 빠져 한국으로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그가 마카오에서 수표를 사용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외사수사대는 수표번호와 배서자를 역추적했다. 경찰은 그의 계좌 거래 내역을 추적하는 동시에 비슷한 시기에 마카오로 출국한 사람들의 행적에 대해서도 수사를 확대했다. 여기에 카지노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해 본 결과 사건이 심상치 않다는 점을 감지했다.
외사수사대는 증거를 확보한 뒤 국내 부유층 인사 20여 명을 상습도박 혐의로 검거했다. 그 외 환치기 업자 및 통장대여자 15명을 외국환거래법 및 전자금융거래법 위반으로, 롤링 조직 업자 등은 도박 방조(알선) 혐의로 입건했다. 도박을 알선하거나 불법적 방법으로 송금하는 행위를 돕는 것 모두 ‘방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경찰 조사 결과 롤링 조직은 마카오 도박 시장에 진출하면 어마어마한 수익을 낼 수 있다는 미끼로 국내 부유층 인사들에 접근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부유층 인사들이 사업 투자에 앞서 현지를 둘러보기 위해 마카오를 방문한다는 점을 십분 이용했다.
항공권, 호텔 사용권, 벤츠 등 고급 차량 등 VIP급 편의를 제공하며 고객 관리에 심혈을 기울였다. 부유층에게 호감을 얻은 롤링 조직은 이들을 카지노로 안내했고, 부유층은 쉽게 ‘바카라’ 유혹에 빠져들었다.
‘바카라’는 두 장의 카드를 더한 수의 끝자리가 9에 가까운 쪽이 이기는 게임이다. 3월 29일 기자와 통화한 부산지방경찰청 관계자는 “게임 방법이 단순해서 누구나 즐길 수 있고, 이 때문에 중독되기도 쉽다”고 말했다. 롤링 조직이 사업 차 방문한 국내 부유층 인사들에게 ‘바카라’를 권유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롤링 조직이 한국고객 유치에 필사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롤링 조직은 한국 관광객을 카지노에 데려가 도박을 시키는 대가로 카지노 업체로부터 일정량의 커미션(중개 수수료)을 받는다. 해당 고객이 베팅하는 액수의 1~1.25%의 수준이다. 도박장에서 이뤄지는 베팅 액이 대체로 크기 때문에 1%의 커미션도 적은 액수가 아니다. 게다가 커미션 자체는 처벌대상이 아니다. 이들 조직은 도박 중인 고객에게 환치기(통화가 다른 두 나라에 각각의 계좌를 만든 뒤 한 국가의 계좌에 돈을 넣고 다른 국가에 만들어 놓은 계좌에서 그 나라의 화폐로 지급받는 불법 외환거래 수법) 업자를 연결시켜 도박 자금을 현지에서 빌려주고 지인으로부터 인터넷 뱅킹을 통해 변제받는 수법을 활용했다.
부산경찰청 관계자는 “환치기 수법도 진화했다. 계좌 추적에 걸리지 않도록 현금 또는 신용거래를 이용하기 때문에 입증이 쉽지 않다”면서 “순수하게 검거된 인원은 45명이지만 조사대상자는 그보다 훨씬 많다. 관여된 다른 롤링 조직이 있는지 찾아보면서 수사를 확대할 방침이다”고 말했다.
마카오 정부가 외국인의 카지노 투자를 허용한 2002년부터 마카오 카지노 시장에 진출한 한국인 수는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마카오의 카지노 붐을 지켜보던 수많은 한국 청년들이 해외 카지노 딜러로 성공하기 위해 마카오를 찾기도 했다. 하지만 마카오 법에는 카지노 딜러로 자국인만 고용하도록 규정돼 있었다.
딜러 외에 카지노 정식 직원으로 고용되는 것도 ‘하늘의 별 따기’였다. 한국인 1000명 중에 한 명꼴로 정식 직원 채용이 가능하다는 말이 나돌 정도다. 이 때문에 정식 취업 비자 없이 불법 체류자 신분으로 머물고 있는 한국인이 많다고 한다.
‘마카오 드림’을 갈망하고 어렵게 중국으로 건너온 한국 청년들은 생계유지가 어려워지자 다른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당시 마카오에서는 한국 고객과 카지노를 연결하는 롤링 조직이 급격히 성장하고 있었다. 커미션만으로 최대 200억 원까지 매출을 올린다는 소문이 퍼지자 조직이 더욱 확대됐던 것이다.
궁지에 몰린 한국 청년들은 롤링 조직에 흡수됐고, 국내 부유층 인사들을 꾀어 도박에 끌어들이는 알선업자로 변신한 것이다.
부산경찰청 관계자는 “‘마카오 드림’이란 잘못된 정보에 현혹돼 취업을 시도하다 실패한 젊은 친구들이 롤링 조직에 흡수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이번 사건의 이면에 숨겨진 가장 큰 사회적 문제라 생각한다”면서 “롤링 조직 확대를 막기 위해서라도 한국 청년들에게 ‘마카오 드림’의 실상을 알릴 필요가 있다”며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
정유진 기자 kkyy1225@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