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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찰서 소파에 쭈그려 앉은 피의자 신씨는 “카드 를 사용한 게 죄가 될줄은 몰랐다”며 때늦은후회 의 눈물을 흘렸다. | ||
소란스러운 바깥 분위기와는 달리 경찰서 형사계 사무실은 유난히 조용했다. 방송사 카메라와 기자들이 한 차례 정도 들이닥쳤을 뿐이었다. 그마저 잠잠해질 무렵,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못하는 한 여인이 구석을 지키고 있었다.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이 여성은 내심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손톱만 깨물고 있었다. 엄청난 사고를 불러온 한낮의 뜨거운 태양이었건만, 그 햇살에 비춰진 그녀의 얼굴은 왠지 차갑고 쓸쓸하게만 느껴졌다. 갈색으로 염색한 긴 머리를 질끈 동여맨 채 청바지를 입고 있던 그녀. 아직 처녀티를 못벗은 그녀는 어떤 사연을 품고 있었던 것일까.
“착실하고 돈도 좀 모아둔 시동생이 하나 있는데, 네 주변에 어디 참한 처녀 없나?”지난해 9월 초 부산에서 건강보조식품을 판매하는 다단계 회사에 다니고 있던 전향미씨(가명·32)가 회사 후배 신숙자씨(가명·26)를 넌지시 떠봤다. 직장생활을 하며 혼자 자취하고 있던 시동생 손봉석씨(가명·26)가 늘 안쓰러웠던 전씨였다.
신씨가 최근 이혼을 한 마당이어서 그런 얘기 꺼내기는 사실 약간 조심스러웠다.이 말을 들은 신씨는 뜻밖에도 “와 없겠나, 내랑 나이도 같고 괜찮은 친구가 하나 있는데 마침 잘됐네”라며 흔쾌히 맞장구를 쳤다. 자신과 매우 닮았다고도 했다. 의기투합한 전씨와 신씨 두 사람은 각각 자신의 시동생과 친구를 맺어주기로 했다. 둘이 끼면 자리가 어색해질까봐 당사자끼리 연락해 만나는 방법을 택했다.
같은 달 14일 저녁, 사하구 괴정동의 한 커피숍에서 만난 두 남녀. 그러나 이날 전씨의 시동생 손씨의 앞에 나타난 사람은 바로 신씨 본인이었다. 자신을 신씨의 친구 양연희(가명)라고 속인 채. 이 같은 사실을 알 리 없는 손씨는 신씨의 말을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었다.
신씨는 이름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속였다. 자신을 세무회계사무실 계장으로, 그리고 2백50만원 가량의 월급을 받고 있는 정말 ‘참한 처녀’로 소개했다. 5분 남짓 이어진 둘의 만남은 신씨가 일어학원에 가야 한다고 했기 때문에 그쯤에서 끝났다.
“어떻더노?”맞선에서 돌아온 시동생을 세워놓고 전씨가 질문을 퍼부었다. 상대 여성의 성격이나 외모, 신체조건 등 이것저것을 꼬치꼬치 캐물은 전씨. 곧 다시 만나기로 했다는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닮았다고 하더만 말투까지 똑같다는 거 보니 참말로 비슷한가보네…’
맞선 이후 두 남녀는 하루가 멀다하고 만났다. 그렇게 2주가 지났을 무렵, 사하구의 한 술집에서 술을 마신 날이었다. 술기운이었을까. ‘참한 처녀’로 위장한 신씨는 대담하게도 “오빠 사는 자취방 구경하고 싶다”며 초량동에서 혼자 사는 손씨의 집을 찾았다.
이날 신씨는 사장이 자기 몸을 건드린다는 말을 털어놓았다.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손씨는 가만히 안아 줄 뿐이었다. 한 사람의 상처를 공유한 그때부터 둘의 사이는 빠르게 가까워졌고, 그녀가 손씨 집에 발걸음을 하는 횟수도 잦아졌다.
둘의 동거가 시작된 것은 그해 11월 중순. 그 즈음 신씨는 손씨에게 “친구와 같이 사는데 그 친구의 남자친구가 오면 눈치가 보인다”고 말한 뒤 “오빠, 내가 여기서 같이 살면 안되나”라며 동거를 제안했고, 손씨는 받아들였다. 공교롭게도 그 다음날은 손씨가 그동안 부어온 1천만원짜리 적금을 타는 날이었다.
동거를 시작하면서 손씨를 하나하나 챙기는 신씨의 모습은 영락없는 ‘예비 신부’였다. 일단 그녀는 “모든 돈을 (한 곳으로) 묶어주겠다”며 그가 차곡차곡 모아온 예금과 월급을 틀어쥐었다. “남자가 카드를 가지고 다니면 술 마시고 다 써버린다”며 신용카드 역시 빼앗다시피 가져갔다.
손씨도 처음에는 “그냥 내가 관리하겠다”며 거절했지만 그녀의 거듭된 요구에 승낙하고 말았다.신씨가 서서히 본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지난 4월부터였다. “사무실에서 대전공사를 땄는데, 내가 어음할인 해야 한다”며 첫 번째 출장을 떠났다.
그때부터 그녀는 ‘회사일 때문에’ ‘삼척의 삼촌이 편찮아서’ ‘삼척 친구 엄마가 돌아가셔서’ 일주일에 3∼4일씩 집을 비웠다.손씨는 이런 그녀를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애당초 맞선을 주선했던 형수 전씨가 더 몸이 달았다. 시동생과 사귄 지 오래됐는데 얼굴 한 번 보여주지 않는 ‘참한 여자’에 대해 의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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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거하던 손씨에게서 벗어나 도망가기 위해 ‘짜낸’ 신씨 나름대로의 방법이었던 셈이다. 형수에게 연락을 받고 놀란 손씨는 어느 병원인지도 모르고 무작정 강릉으로 올라가 응급실이란 응급실은 모두 찾아 다녔다. 양씨의 이름은 어느 병원에도 없었다. 낙담해서 내려온 손씨에게 형수는 “혹시 양씨의 사진을 갖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동안 가슴속에 희미하게 품고 있던 일말의 의혹 때문이었다.
사진을 확인하는 순간 전씨는 가슴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사진 속의 주인공은 양씨가 아니라 다단계 판매회사에서 함께 근무하던 이혼녀 신씨, 맞선을 주선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회사를 그만둔 신씨였던 것.
뒤늦게 자신이 속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내는 어쩔 수 없이 경찰의 도움을 청했다. 다행히 신씨는 지난 7월22일 새벽, 전 남편과 다섯 살난 딸을 만나기 위해 부산에 내려왔다 현장을 급습한 경찰에 검거됐다.
조사결과 그녀의 신출귀몰 행각은 차례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경찰에 따르면 신씨는 지난 95년 여상을 졸업한 해 자신이 근무하던 T산업에서 첫 번째 남편을 만났다. 이 남자와 지난 97년 딸아이를 낳는 등 순탄한 결혼생활을 해나갔다.
문제가 발생한 것은 그녀가 지난 2000년 남편 몰래 다단계 판매업에 뛰어들면서부터.일단 그녀는 다단계판매 시작과 함께 3백50만원 상당의 물품을 카드로 구입해야 했다. 그 뒤로도 9개월간 시댁에 생활비 명목으로 보내던 60만원을 빠뜨리지 않기 위해 신용카드 신세를 져야 했다. 이 사실은 결국 지난해 8월 남편에게 발각됐고, 1천만원 가까운 카드빚이 화근이 돼 둘은 이혼하고 말았다.
참한 처녀인 것처럼 손씨에게 접근했던 것이 그로부터 한 달 뒤인 9월이라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그녀는 애초부터 돈이 목적이었던 셈이었다. 없앤다며 가져간 신용카드는 대금청구지 주소만 전에 머물던 친구 집으로 바꾼 채 계속 사용했다. 그 빚이 이미 2천만원을 넘기고 있었다. 손씨가 그동안 차곡차곡 모아둔 2천여만원의 예금과 매달 입금됐어야 할 월급 역시 단 한푼 남아 있지 않았다. 심지어 은행 대출금도 수천만원에 달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사실은 신씨가 손씨와 동거하는 기간에도 다른 남자와 동거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것. 일주일에 3∼4일씩 갖은 핑계로 집을 비웠던 것이 바로 그 때문이었다.
경찰조사결과 피의자 신씨는 지난 4월부터 인터넷 게임을 통해 대전의 김아무개씨(26)를 알게 됐다고 한다. 적게 잡아도 3개월 가량은 일주일에 절반씩 부산과 대전을 오가며 ‘두 집 살림’을 해왔던 셈.
이처럼 지난 일년 동안 한 남자의 부인이자 딸아이의 엄마로, 곧 결혼을 앞둔 참한 처녀로, 동시에 또 다른 남자의 연인으로 관계를 맺고 있던 그녀. 경찰서에서 만난 피의자 신씨는 “처음에는 아무 생각없이 맞선에 나갔을 뿐이며, 카드를 사용한 것이 죄가 될지 몰랐다. (손씨의 돈은)언젠가는 갚을 생각이었고 그렇게 많이 쓴지도 몰랐다”며 때늦은 후회의 눈물을 흘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