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민경욱 대변인은 지난 12월 24일 오전 브리핑에서 군인연금과 사학연금 개혁 논란과 관련한 질문을 받고 이렇게 답했다. 이는 이틀 전인 22일 박근혜 대통령 주재 국민경제자문회의 겸 경제관계장관회의에서 군인연금·사학연금 개혁 방침이 거론된 뒤 23일 새누리당의 강한 반발, 정부의 발 빼기 등으로 혼선이 빚어지던 와중에 나온 청와대의 반응이었다. 군인연금·사학연금 개혁은 공무원연금 개혁과 함께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 공약사항이었던 만큼 ‘대통령의 입’이라고 할 수 있는 민 대변인의 답변은 더할 나위 없이 군색하고 무성의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박근혜 대통령의 개혁 드라이브와 관련 새누리당은 “정부 뒤치다꺼리 하다가 골병이 들 지경”이라며 강력 반발하고 있다. 사진은 새누리당 원내 회의 모습.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민경욱 대변인이 이렇게 부처 떠넘기기에 급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예상을 뛰어넘은 새누리당의 반발 때문이었다. 실제로 12월 23일 새누리당 원내대책회의에서 오간 군인연금·사학연금 개혁 관련 발언들은 ‘이게 과연 여당 회의 자리가 맞나’ 싶을 정도로 거칠고 노골적으로 정부를 비판하는 내용들이었다.
새누리당 내에서 대표적인 친박계로 꼽히는 김재원 원내수석부대표는 “힘들고 어렵게 공무원연금 개혁을 하고 있는데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이렇게 정부에서 숙고하지 못한 얘기가 밖으로 나오고 이해관계자들의 걱정을 끼치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일”이라고 질타했다. 김 수석부대표는 “정부 뒤치다꺼리 하다가 골병이 들 지경”이라면서 “(관련자) 문책이 뒤따라야 한다”고까지 했다. 그가 좀처럼 분을 삭이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자 이완구 원내대표는 “정부 측에 확실하고 엄중하게 얘기하겠다”며 진정시켰다.
김 수석부대표 등의 정부 비판은 비공개회의로 들어가기 전 모두발언 때 나온 것이어서 더욱 충격적이었다. 많은 기자들이 지켜보고 있었고, 결국 이 장면은 방송 뉴스를 통해 중계됐다. 더욱이 주호영 정책위의장과 김현숙 원내부대표가 언론 보도가 나온 게 정부 회의 자료를 만든 기재부 실무자의 실수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군인연금·사학연금은 공무원연금과 동시에 손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갖고 점검해 볼 과제라고 정부와 정리했다”고 선을 그은 터였다.
그런데도 여당 지도부가 드러내놓고 정부를 ‘들이받는’ 모양새가 연출된 것은 박근혜 대통령의 2015년이 순탄치 않을 것임을 예고하는 징후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새누리당 고참 당직자조차 “정부가 2015년 경제정책의 큰 그림을 내놓은 건데 여당 지도부에서 너무 호된 질책을 쏟아냈다”며 “실무진의 실수가 있었든 없었든, 당장 추진을 하든 안하든 군인연금·사학연금 개혁은 대통령의 대선 공약 사항이다. 이런 식으로 여당이 반발하는 것은 임기말적 상황에나 가능한 일”이라고 밝혔다.
문제는 군인연금·사학연금 개혁 논란은 앞으로 가시화될 당·청 충돌의 여러 사례 중 하나일 뿐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청와대와 새누리당 관계자들도 2015년의 당청관계 전망을 묻는 질문에 한숨을 내쉬고 있다. 이들의 공통 인식은 “충돌은 피하기 어렵다”였다. 가장 큰 이유는 2015년의 의미에 대한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의 인식차가 좁혀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집권 3년차인 2015년이 박근혜 정부 5년의 성패를 좌우할 해로 보고 그야말로 국가 개조 수준의 어마어마한 개혁 청사진을 내놨다. 노동시장·금융·연금·교육·주택·공공기관, 6대 분야 개혁이 그것이다. 여기에는 정규직 노동자의 해고는 쉽게 하고 비정규직 노동자의 고용안정성을 높이는 노동시장 개혁, 금융권의 보신주의 타파, 공무원연금 등의 개혁, 가을학기제 도입 등 교육 개혁, 주택경기 활성화를 위한 민간임대사업 확대, 공공기관 사업 조정 등이 망라돼 있다.
2015년을 맞는 박 대통령의 의욕은 12월 22일 회의에서 “내년(2015년)은 임기 기간 동안 전국 단위 선거가 없는 유일한 해”라며 “우리 경제의 체질을 개선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로 생각하고 경제혁신 3개년 계획 추진에 총력을 다해야하겠다”고 밝힌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났다. 특히 비공개 회의에서 쏟아낸 발언들은 박 대통령의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 여실히 보여준다.
박 대통령은 “역대 정부에서 하다하다 힘들어 팽개치고 꼬이고 꼬여서 그냥 내버려둔 게 전부 우리 눈앞에 쌓여 있다”며 “이것을 해결하고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우리는 선진국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결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팔자’까지 입에 올리면서 장관들과 참모들을 독려했다. 박 대통령은 “그런 어려운 문제를 왜 우리가 해결해야 하나 생각하면 안 된다. 우리가 아니면 누가 하겠느냐”면서 “이게 우리 팔자다, 이렇게 생각하고 반드시 해결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2015년이야말로 주요 개혁 과제를 완수할 ‘골든타임’이라는 박 대통령과 달리 새누리당에게 2015년은 2016년 국회의원 총선과 2017년 대선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두 번의 중요한 선거에서 큰 수확을 얻으려면 씨도 뿌리고, 거름도 주면서 논밭을 가꿔야 하는 것이고, 2015년은 바로 그런 일에 주력해야 하는 시기라는 얘기다. 민심을 떠나게 할 수 있는 일은 벌이지 않고 상처받은 민심을 수습하는 시간이 돼야 하는 것이다.
이런 와중에 박 대통령의 개혁 드라이브는 새누리당으로서는 탐탁지 않을 뿐 아니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일 수밖에 없다. 한 새누리당 재선 의원은 “대통령과 정부가 실현 가능한 개혁 플랜을 놓고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하는데, 너무 어렵고 많은 과제들을 상정해 두고 있다”며 “노동시장 개혁, 연금 개혁, 공공기관 개혁 등은 하나하나의 이해당사자가 수백만 명에서 수천만 명에 달할 수도 있는 사안이다. 임기 중에 이 중 하나만 달성해도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을 텐데 이들을 동시에 다 하겠다고 덤비는 것은 과욕을 넘어 지나치게 위험한 도박”이라고 지적했다.
청와대 문건 유출 파문을 계기로 ‘콘크리트 지지율’에 균열을 노출하기 시작한 박 대통령으로서는 여당과의 기 싸움이라는 또 하나의 과제를 짊어지게 된 셈이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