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임태희 대변인은 “박 대표가 추석을 앞두고 이 전 총재를 방문해 취임인사를 하고 정국운영에 대한 조언을 구할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과거사 규명 문제와 국가보안법 폐지 논란 등에 정치권 원로의 고견을 구하는 자리라는 설명이다. 대변인실 관계자는 “추석 전에 이 전 총재와 만나기로 정해진 상태”라며 이 전 총재가 박 대표의 방문 요청에 응했음을 밝혔다.
그러나 두 사람의 회동 약속이 ‘별 탈 없이’ 성사된 것에 대해 다소 의아해하는 시각도 있다. 박 대표는 지난 2002년 초 이 전 총재 1인 중심적 당 운영에 대해 비주류로서 목소리를 높이다 탈당을 해 당시 대선을 앞두고 강하게 일어났던 ‘이회창 대세론’에 흠집을 입힌 전력이 있다. 박 대표 체제로 치러진 지난 17대 총선 과정에선 비례대표 상위순번에 배치될 것으로 예상됐던 이 전 총재 측근인사들이 막판 영입인사들에 밀려 국회입성이 좌절되기도 했다.
이 전 총재 최측근 인사인 유승민 의원은 “박 대표 탈당이야 벌써 2년이 지난 일이고 대선 막판에 복당해 이 전 총재를 헌신적으로 도왔다. 지난 총선 비례대표 공천은 박 대표가 좌지우지한 것이 아니다”라며 갈등설을 차단했다.
그러나 박 대표가 2002년 대선 과정에서 당내 비주류로 목소리를 높이며 정치적으로 주목받았을 때나 야권의 대표적 대권주자로 급부상한 지난 17대 총선 과정에서 크든 작든 이 전 총재측을 섭섭하게 만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과거의 인연을 떠나 이 전 총재 개인적 입장에서도 이번 박 대표와의 회동이 부담스러울 수 있다는 평이 나온다. 정계 은퇴를 선언한 이 전 총재는 어떤 형태로든 간에 정치면에 기사로 다뤄지는 것을 부담스럽게 느껴왔다. 유승민 의원은 “박 대표와의 회동 자리에 기자들이 대거 몰려가면 (이 전 총재가) 부담스러워 하실 수도 있는데…”라며 우려를 표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정치적 추측을 낳게 할 수 있는 박 대표와의 회동에 이 전 총재가 선뜻 응한 것에 의아해 하는 시각도 있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두 분에게 어색함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잠깐 만나 이야기 나누는 것으로 여러 긍정적 효과를 본다면 두 분 모두에게 좋은 것 아니겠나”라 밝힌다. 이번 박 대표와 이 전 총재 양측에 모두에 ‘보탬’이 될 것이란 판단에 회동이 성사됐다는 관측이다.
박 대표는 당 안팎으로부터의 계속적인 공격을 받아왔다. 여권의 국가보안법(국보법) 폐지 주장에 박 대표는 “내 모든 것을 걸고 막겠다”고 천명했지만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국보법 피해자들의 증언과 피해사실이 속속 드러나고 있는 점은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친일행위 여부가 중심이 되는 과거사 규명 작업에서 여권의 공세 범위에 박정희 대통령이 포함되는 것 역시 박 대표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대목이다.
한나라당엔 박 대표를 대신해 여권의 파상공세를 대신 받아내줄 확실한 자파세력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이재오 김문수 의원 같은 ‘걸출한’ 비토세력이 연일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 같은 상황은 박 대표가 바깥으로 눈을 돌리게 만들었다는 지적이다. 한나라당의 한 의원은 ‘노무현 대통령이 대통령 후보 시절 당내 자파세력 부재를 대중적 인기로 만회해 결국 대선 승리까지 이른 점’을 상기시키며 “최근 정치상황에선 외부의 큰 지지를 이끌어내는 것이 당내 자파세력을 늘리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밝힌다. 국보법 정국에서 사회 원로들이 국보법 폐지 반대를 주장하는 시국선언을 해준 것은 박 대표에게 큰 힘이 돼 주었다는 평이다. 물론 유신시대와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시절의 독재세력과 부정부패 연루자가 상당수 포함됐지만 박 대표로선 당 외부의 ‘눈에 확 띄는’ 공개적 지지 선언에 표정이 밝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 전 총재와의 회동은 이 같은 당 외부의 보수세력에 보여주는 일종의 선전전 역할을 할 수 있다는 평이다. 유승민 의원도 “이 전 총재가 정치를 떠난 분이지만 이 전 총재가 여전히 갖고 있는 정치적 자산은 박 대표에게 앞으로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라 밝힌다. 그만큼 아직도 한나라당 지지자들에겐 이 전 총재를 향한 향수가 크게 남아있다는 것이다.
당내 비토세력의 공세에 대한 어느 정도의 방패 역할도 기대할 수 있다는 평이다. 지난 7일 박 대표 비토세력의 중심인 이재오 의원이 이 전 총재의 서울 옥인동 자택을 방문해 환담을 나눴다. 당시 이재오 의원측은 “이 전 총재는 군사정권과 관계 없는 분이다. 한나라당 내 민주개혁 세력을 대표하는 이 전 총재를 만나 박 대표가 전횡하는 현 상황에 대한 고견을 들을 것”이라 만남의 배경을 밝혔다.
그러나 박 대표가 추석 전에 이 전 총재를 만날 경우 이는 이재오 의원의 방문보다 더 큰 조명을 받으며 수많은 정치적 추측을 낳게 할 수 있다. 이 의원의 옥인동 방문 의미가 퇴색될 수 있는 것이다. 아울러 지난 대선 이후 당내 입지가 추락하고 공천 과정에서도 배제된 당내 ‘친 이회창’ 세력에 대한 위로도 겸할 수 있을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박 대표와의 만남이 다소 어색할 수도 있는 이 전 총재측에도 이번 회동이 긍정적 효과를 가져다 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전 총재는 주변 측근들에게 대선자금 수사로 구속돼 아직 수감중인 자신의 측근인사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시해왔다. 이 전 총재의 한 측근인사는 “(이 전 총재가) ‘내가 죄인인데 왜 다른 사람을 고생시켜야 하는지…’라며 탄식하는 것을 종종 봤다”고 전했다. 박 대표와의 회동을 통해 이 전 총재 본인이 의도하지 않더라도 여전히 영향력을 갖고 있는 야권의 원로라는 점을 부각시키면 소문으로만 나돌고 있는 ‘연말 대사면설’에 조금이나마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작용했다는 것이다.
‘이회창 만한 인물이 없다’는 말이 계속 나오는 야권의 현 상황에서 이 전 총재의 ‘화려한 컴백’을 점치는 조심스러운 시각도 나온다. 그러나 이 전 총재 측근들은 “이미 정치를 떠난 분”이라며 극구 가능성을 부인한다.
이번 회동 이후 박 대표의 입지가 더욱 탄탄해질 수 있을 것인지, 그리고 이 전 총재가 다시금 정치권의 핵으로 등장할 수 있을지를 궁금해하는 정객들은 벌써부터 옥인동을 향해 귀를 기울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