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경찰은 사건 발생 보름이 지나도록 “경찰이 파악하고 있는 ‘러시아 마피아’는 없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심지어 한 경찰은 “지금까지 경찰이 검거한 것으로 발표한 ‘러시아 마피아’는 모두 허구”라는 말까지 했다. 부산에 상륙한 러시아 마피아는 과연 없는 것일까. ‘얼굴 없는’ 러시아 마피아 공포의 진원지를 쫓아가 봤다.
이 사건 이후 부산지방경찰청은 즉각 수사본부를 꾸려 범인 추적에 나섰다. 지난 4월25일 수사본부는 사건 발생 9일 만에 공범 용의자 2명을 체포, 구속하기도 했다. 하지만 수사본부 관계자들이 ‘마피아’라는 말이 나오면 한결같이 이렇게 입을 모은다. 바로 “마피아는 없다”는 것.
수사본부의 윤삼 부산경찰청 형사과장은 25일 “부산에 입국해 있는 마피아는 현재까지 확인된 바가 없다”라며 “(공범으로 체포된) 이들 역시 마피아인지 여부를 좀 더 확인해 보아야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부산에서만 20년이 넘도록 조직폭력 수사를 맡아 온 부산경찰청의 한 형사는 “부산지역 조직폭력배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알고 있다”고 전제하며 “부산 조폭이 러시아 마피아와 연계를 했다면 내가 모를 리가 없다”는 말로 ‘국내 조폭 연계설’을 일축했다.심지어 부산경찰청 외사과는 몇 해 전 자신들이 검거해서 ‘러시아 마피아 조직원’이라고 발표한 범죄인에 대해서도 “마피아 조직원은 아니었다”고 말을 바꿨다.
대표적인 예가 98년 이른바 ‘시마 바소(바소의 가족들)’사건. 러시아 마피아 조직원이었던 바소(50)가 부산시 초량동 윤락가 일명 ‘텍사스촌’ 외국인들을 모아 폭력조직을 구성한 뒤 마약 밀매를 한 사건이다. 당시 이들 10명 중 8명을 검거했던 부산경찰청 외사과는 검거 후 언론에 보도자료를 내면서 바소를 ‘러시아 마피아 조직원’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외사과 관계자는 지난 25일 “당시에 표현한 ‘러시아 마피아’는 러시아 국적을 가진 범죄자를 일컫는 통칭이었다”며 역시 “부산에 마피아는 없다”고 말했다.
부산경찰청의 또다른 형사는 “바소 사건 당시에 나도 외사과 관계자들에게 같은 질문을 했는데 ‘마피아 조직은 없고 (다만) 검거 공치사를 하기 위해서 마피아라는 말을 넣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검찰 역시 ‘마피아’의 실체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운 입장. 이번 사건의 주임검사인 부산지검 강력부 권오성 검사는 “피살자 와실리의 신원 확인을 러시아에 요청해둔 상태다. 러시아측의 답변이 오기 전까지 ‘마피아’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도록 경찰에 지시해 뒀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부산 시민들을 불안하게 하는 실체는 무엇일까. 부산에서 30년 넘게 택시 운전을 했다는 이태복씨(가명·56)는 기자에게 이렇게 전했다. “러시아 마피아 조직이 들어와 있는 것은 물론이고 부산의 칠성파나 신21세기파 등과 선이 닿아 있다는 얘기는 5∼6년 전부터 나돌았던 얘기다. 우리 같은 (수사)비전문가들도 다 알고 있는 얘기를 (수사)전문가들은 왜 모르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총격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새삼스럽게 호들갑을 떠는 신문들도 마찬가지다.”
‘러시아 마피아’에 대한 시민들의 불안감은 최근 몇 년 새 통계로도 드러난다. 부산경찰청에 따르면 지난 1992년부터 2002년까지 10년 동안 부산에서 총기를 밀반입하다 적발된 것은 모두 11건. 각 건당 1명씩 모두 11명이 검거됐는데 이 중에서 러시아 사람이 5명으로 가장 많았고 우리나라 사람은 2명, 중국 폴란드 필리핀 등이 1명씩이었다.
그렇다면 이 같은 수치에도 불구하고 경찰이 ‘러시아 마피아’의 존재를 굳이 감추려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선 경찰서 폭력계의 C형사가 좀 더 솔직한 얘기를 들려줬다. “부산에 드나드는 러시아인이 하루에도 수천 명인데 누가 마피아인지 알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마피아가 없다는 얘기는 결국 모른다는 얘기다.”
마피아 조직에 대한 정보가 없다는 것도 또다른 이유. 경찰이 현재 러시아 마피아에 대해 갖고 있는 자료는 99년 국정원이 파악한 자료가 전부다. 수사본부 관계자는 “국정원이 99년 딱 한 번 경찰에게 마피아 자료를 넘겨줬을 뿐 그 전이나 후에 자료 공조가 된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러시아 마피아가 한국에 상륙해서 사업을 벌이고 있는 것은 이미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부산지역의 마피아 조직원들은 수산업 밀매 혹은 경매에 개입하거나 선박 소유 및 수리 또는 중고 자동차 매매 등의 사업에 손을 대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지난해 5월 부산지방해양수산청의 수산물 밀거래 현황 파악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해양수산청은 수산업자들에게 ‘러시아 선박과의 밀거래 현황을 보고하라’고 통보했지만 결국 업자들의 반대로 조사조차 하지 못했다. “정부가 조사를 하면 러시아 선박이 부산을 떠날 테고 그렇게 되면 싼 값에 사오던 수산물 거래선이 끊기게 된다”는 것이 수산업자들의 항변.
결국 몇몇 업자들과의 ‘뒷거래’를 위해 러시아 선박은 앞으로도 부산 앞바다에 닻을 내릴 것이라는 얘기다. 그리고 경찰과 수사 당국이 마피아 대책을 전면적으로 세우지 않는 한, 부산 시민들은 시내 곳곳을 떠도는 러시아 마피아의 ‘유령’에 시달려야 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