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유층들이 많이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진 평창동 주택가. 최근 검거된 절도 용의자 이씨는 사설경비 업체의 방범망 이 미치지 않도록 화장실 창문등으로 침입하는 수법을 사 용했다고 한다. | ||
경찰은 실제론 신고된 액수보다 훨씬 더 많이 털렸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도난 피해자들은 대부분 절도 사실 자체를 ‘쉬쉬’하고 있다. 도난 사실을 신고하기는커녕 차라리 조용히 넘어가길 바라는 눈치다. 그래서 경찰도 수사에 애를 먹고 있다.
부촌 연쇄절도 사건의 꼬리가 잡힌 것은 최근 서울 성북경찰서가 이아무개씨(38)를 절도혐의로 구속하면서부터. 경찰 조사 결과 이씨는 지난 2월부터 평창동, 성북동 등 세칭 부촌을 돌며 수억원대의 귀중품과 현금을 훔친 것으로 밝혀졌다.
이씨의 범행수법은 수사 경찰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로 대담했다. 이씨는 사설 경비업체의 방범망이 미치지 않는 화장실 창문 등을 통해 침입, 물건을 훔친 뒤 유유히 사라졌다. 성북경찰서 김두식 반장은 “이씨는 사설 경비망의 취약점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라며 “교도소 복역 시절 알게 된 죄수들로부터 범죄수법을 전수받았던 것으로 밝혀졌다”고 설명했다.
이씨가 지난 2월부터 훔친 물건은 4억5천여만원대. 절도품 중에는 3천만원 상당의 진주 목걸이 세트를 비롯해 2천5백만원짜리 밍크코트, 수천만원을 호가하는 예물시계 등 초고가 명품 일색이었다. 이씨는 훔친 물건을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장물아비 김아무개씨(50)를 통해 처분했다.
이씨가 붙잡힌 것은 사건현장의 CCTV에 녹화된 수상한 차량의 번호가 단서였다. 문제의 차량은 노숙자 명의로 등록된 대포차였지만, 경찰은 차주로 된 노숙자의 신병을 확보, 범인 이씨의 실체를 파악해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씨는 경찰의 수사망이 좁혀지자 종적을 감췄다. 이씨가 경찰에 붙잡힌 것은 ‘우연의 일치’였다. 용의자를 검거하는 데 실패한 경찰은 용의자 자택 인근에 있는 여관에 숙소를 정했다. 공교롭게도 수사진이 숙박하고 있던 여관에서 문제의 대포차가 발견된 것. 용의자가 경찰 눈을 피해 달아난 곳이 수사팀과 같은 여관이었던 것이다.
경찰은 즉시 여관에 투숙하고 있던 이씨를 검거해 경찰서로 연행했다. 그러나 이씨와 경찰의 숨바꼭질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씨는 경찰에서 범행 사실을 완강히 부인했다. 경찰 또한 명확한 물증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런데 의외로 일을 쉽게 풀려나갔다. 이씨의 지갑 속에서 발견된 미화 2달러짜리가 도난 접수된 지폐의 일련번호와 일치했던 것. 결국 이씨는 문제의 2달러로 인해 경찰에 잡혔다.
▲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주민들도 잇단 도난사건으로 불안에 떨고 있다. | ||
김 반장은 “용의자로부터 물건을 인도받은 장물아비가 경찰에서 ‘이씨로부터 받은 12억원대에 달하는 무기명 채권을 처분할 수 있겠느냐’는 진술을 했다”고 말했다. 장물아비가 이씨로부터 12억원 상당의 무기명채권도 받았다는 얘기. 이와 같은 근거로 경찰은 피해액이 수십억원대에 달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당사자인 이씨는 현재 추가 범행 사실을 완강히 부인하고 있다. 더군다나 문제의 무기명 채권에 대한 도난 신고가 아직 접수되지 않은 상태다. 이런 이유로 경찰은 귀중품을 도난당하고도 신고하지 않은 사례가 더 많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번 사건이 발생한 평창동의 한 주민은 “솔직히 부자 동네 사는 게 죄는 아니지 않느냐”며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이 사건을 접한 이후 아이들의 귀가시간까지 앞당겼다”고 말했다.
강남 압구정동 주민들도 요즘 불안하기는 마찬가지. 최근 한 달 사이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에서 네 건의 절도 사건이 잇따라 발생했기 때문이다.
현재 강남경찰서에 접수된 도난 피해액은 수억원대. 지난달 1일 이아무개씨(70)의 아파트에서 4백만원의 현금과 수천만원대에 달하는 루비반지가 사라진 데 이어, 며칠 후에는 이아무개씨(35) 집에서도 현금 5백만원과 수천만원 상당의 보석세트가 털렸다. 지난 1일과 4일에도 2억원 상당의 명품시계 두 개와 패물, 수천만원 상당의 귀중품과 현금 등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경찰은 일단 동일범 소행으로 보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현관문 손잡이를 통째로 부수고 집안으로 들어간 범행수법으로 미뤄 동일범일 가능성이 높다”며 “그러나 범인이 CCTV 화면을 피하기 위해 비상구로 침투해 추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경찰 수사가 답보상태에 빠지자 압구정동 주민들은 더욱 불안해하고 있다. 주민 김아무개씨(54)는 “얼마 전에는 납치된 여대생이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오더니 요즘에는 절도범들마저 날뛰고 있다”며 “이사를 가든지 해야지 불안해서 못살겠다”고 토로했다.
잇따라 도난사고가 터지자 아파트 경비실과 인근 파출소는 비상이 걸렸다. 경찰은 아파트 경비들을 상대로 별도의 방범 교육을 시키고 있다. 압구정파출소 관계자는 “아파트 입주자들로부터 항의가 끊이질 않고 있다”며 “아파트 경비원들에게 CCTV 사용법이나 경비 지침을 교육할 정도다”고 말했다.
이석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