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에 따르면 조씨의 협박 수법은 대담함을 넘어서서 악랄하기까지 했다. 상대방이 돈을 주지 않자 속옷과 양말을 집으로 배달하는가 하면, 그의 집 앞 대문에 불륜 사실을 폭로하는 전단지를 붙이며 압박을 가했다. 심지어 검찰에 소환돼 조사를 받는 상황에서도 “회사에 모든 사실을 알리기 전에 빨리 고소를 취하하라”고 협박을 가했다.
지난달 말 서울지검 동부지청으로 한 건의 고소장이 접수됐다. 54세의 회사원이라고 자신의 신분을 밝힌 K씨는 “한 여성으로부터 끈질기게 협박을 받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검찰에서 피의자 조씨를 소환해 조사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이 한때 내연관계였다는 점이 밝혀졌다. 더군다나 고소인인 K씨는 대기업인 T그룹 건설업체의 이사로 재직중인 상태였다. 그동안 쌓아왔던 자신의 명예가 한꺼번에 무너질 수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K씨가 스스로 ‘검찰행’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K씨가 조씨를 만나게 된 악연은 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 95년 8월 K씨는 건설현장의 소장이었고, 당시 조씨는 이 현장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다. 조씨의 입장에서는 소장인 K씨의 도움과 지원이 당연히 필요했던 상황. 타고난 사교성으로 K씨에게 접근하던 조씨가 K씨도 싫지는 않았다. 서로의 감정을 확인한 두 사람은 이후 밖에서 만나 은밀한 관계를 가지는 사이로 발전했다. 관계가 지속되면서 K씨는 조씨에게 거액의 돈까지 빌려줬다.
당시 단란주점과 식당 등으로 운영비가 부족했던 조씨가 손을 벌리자 선뜻 1억3천만원을 건네준 것. K씨는 이듬해 8월까지 원금을 돌려받는 조건으로 조씨에게 돈을 빌려줬다. 물론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조씨를 의심하지 않았다. 실제 조씨 소유의 업소가 있었기 때문에 돈을 돌려받는 것에 대해서도 별다른 걱정이 없었다. 내연관계인 만큼 이자 정도는 충분히 포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원금을 변제키로 약속한 날짜가 다가올수록 조씨의 마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조씨는 전혀 돈을 갚을 의사가 없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급속도로 악화되기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였다. 돈 때문에 자연히 두 사람 사이에 다투는 횟수도 늘어났고, 결국 만난 지 1년 만에 갈라서야 했다. 빌려준 돈은 관계를 발설하지 않는다는 조건과 함께 돌려받지 않기로 두 사람은 합의를 보았다. 조씨의 배짱에 결국 K씨가 밀린 셈이다. 그것으로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한 번의 바람’은 지나가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닐 줄은 K씨도 상상하지 못했다. 평소 낭비벽이 심했던 조씨는 그 후 돈이 궁해지자 4년 만에 다시 K씨를 찾아왔다. 조씨는 “돈을 주지 않으면 가족과 직장에 불륜 사실을 폭로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기 시작한 것이었다.
K씨는 조씨의 반공갈에 할 수 없이 또 1천만원을 만들어 그녀에게 건네줬다. 자신의 사회적인 지위나 체면이 손상받지 않으려 애쓰는 K씨의 유약함을 간파한 조씨의 협박은 이후 더욱 악랄해졌다. 조씨는 돈이 궁할 때마다 K씨를 찾아와 돈을 요구했다. 그렇게 해서 지난해 12월부터 올 초까지 그가 조씨에게 뜯긴 돈만 4천만원이 넘었다. 끊임없는 협박에도 참고 참았던 K씨가 결국 조씨를 고소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것은 그녀의 끝없는 욕심과 집요함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심지어 조씨는 K씨가 소유한 2억원 상당의 주식까지 알아내고는 그것까지 요구하고 나섰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주식만 건네주면 외국으로 건너가서 조용히 살겠다”고 한 것. K씨가 거절하자 본격적으로 조씨의 엽기적인 스토킹 행각이 시작됐다. 그녀는 우선 자신의 집에 보관중이던 K씨의 속옷과 양말을 소포로 보냈다. 아울러 K씨와 함께 찍은 사진들을 집앞에 주차된 승용차에 붙이며 노골적인 압박을 가했다. 그래도 K씨가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지난달에는 직접 집을 찾아왔다.
조씨는 ‘K씨는 지난 95년부터 한 여인과 부적절한 관계를 지속하고 있다’는 내용의 전단지를 대문과 벽에 도배를 했다. 참다 못한 K씨는 조씨를 명예훼손과 협박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다. 악에 받친 조씨의 행동은 K씨가 고소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그녀는 검찰에 소환돼 조사를 받으면서도 K씨에게 “고소를 취하하지 않으면 사장실에 편지를 보내 창피를 주겠다”는 등의 협박을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신분을 노출시키지 말아달라는 K씨의 간곡한 부탁으로 현재 검찰은 그의 주변 상황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을 피하고 있다.
취재 결과 K씨는 현재 T그룹의 이사로 재직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이 회사는 국내에만 25개의 계열사를 두고 있으며, 건설 경기가 바닥을 쳤던 지난해에도 막대한 수익을 거둔 중견 건설업체였다. 사건 이후 K씨의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조씨가 집에까지 찾아와 벽보를 붙인 탓에 아내가 자신의 불륜 사실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소문이 동네 전체에 퍼져 K씨는 요즘은 바깥출입도 삼간 채 회사와 집만을 오가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석 프리랜서 zeus@newsbank21.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