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력가 노인들만을 상대로 한 살인사건이 서울에서 잇따라 발생해 수사기관이 바짝 긴장하고 있다. 이같은 유사 사건이 최근 한 달 사이 경찰에 접수된 것만 세 건. 특히 피해자들은 모두 둔기로 머리를 난타당한 채 숨져 있었던 것으로 경찰 조사 결과 드러나 동일범 수법이 아니냐는 추측도 오가고 있다. 사고를 당한 장소나 범행 수법, 그리고 피해자의 특성 등에 유사한 점이 많아 동일범의 소행이라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는 것.
그러나 경찰측은 대외적으로 ‘연쇄’라는 표현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고 있다. 연쇄 사건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도 부담스러운 데다가, ‘화성 연쇄 살인 사건’ ‘대전·충청 지역 원룸 여성 연쇄 강도 강간 사건(일명 발바리 사건)’ 등 일련의 사건들이 여전히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오리무중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이번 연쇄 살인 사건은 현재 좀처럼 해결의 실마리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렇게 되자 일각에서는 “영화 <살인의 추억>이 서울에서 재현되는 것이 아니냐”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지난 16일 오후 1시경. 전직 군납업체 대표인 최아무개씨(71)는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지병 치료를 위해 병원에 갔다가 돌아와 보니 아내 유아무개씨(61)가 머리에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었던 것. 유씨는 곧바로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끝내 숨을 거뒀다.
유씨가 살고 있는 삼성동은 강남에서도 알부자가 많기로 소문난 ‘부촌’. 때문에 이 사건으로 이 일대가 발칵 뒤집혔다. 주민들은 신사동 노교수 부부가 피살된 지 한 달도 안돼 또다시 유사한 사건이 이곳에서 발생한 터라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에 앞선 지난 9일 종로구 구기동에서는 사업가 고아무개씨(61)의 아내 이아무개씨(60)와 어머니 강아무개씨(85), 그리고 35세의 아들 등 일가족 세 명이 자신의 집 2층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일요신문> 10월19일자 보도) 경찰 조사 결과 이들도 머리에 둔기를 맞고 숨진 것으로 밝혀졌다.
이렇듯 서울의 부촌을 상대로 연쇄 살인사건이 발생하자 인근 주민들이 공포에 떨고 있다. 주민들을 떨게 하는 이유는 일련의 살인사건이 범행수법이나 장소가 매우 유사하다는 점 때문이다. 피해자들이 공교롭게도 한결같이 둔기로 머리를 난타당한 채 숨졌다. 여기에 피해자들이 모두 대항 능력이 없는 60세 이상의 노인들이었다는 점도 비슷하다.
▲ 신사동 70대 노교수 부부 피살사건(위)과 구기동 일가족 세 명 피살사건(아래)의 범행현장 역시 담장이 낮은 2층 단독주택이었다. | ||
하지만 경찰측은 ‘연쇄’라는 말에 상당한 거부감을 표시했다. 경찰은 세인들의 주목을 받는 게 부담스러운 듯 세 사건은 모두 개별 사건임을 강조했다. 경찰 관계자는 “수법이나 장소 등에서 유사한 점이 있지만 그것만으로 동일범이라 단정하기는 무리”라며 “현재 금품을 노린 우발적인 범행 쪽에 초점을 맞추고 수사를 진행중”이라고 말했다.
경찰에 따르면 사건 피해자들은 대부분 수십억대 부동산이나 동산을 소유하고 있는 재력가들인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삼성동 유씨의 경우 최근 23억원대의 부동산 거래를 한데다, 시가 20억원 상당의 삼성동 자택도 매물로 내놓은 상태. 때문에 이 재산을 노리고 범행을 모의하지 않았겠냐는 게 경찰측의 조심스런 견해다.
그러나 이번 사건을 단순한 우발적인 범죄라고 넘겨버리기엔 석연치 않은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재산을 노린 범죄라고 보기에는 살해 동기가 분명치 않기 때문.
첫째 이유는 사건 현장에 현금이나 귀금속 등이 전혀 도난당하지 않았다는 점. 경찰에 따르면 지난 16일 발생한 삼성동 사건에서는 현금 1백35만원과 1백만원 자기앞수표 3매 등이 안방 서랍에서 고스란히 있었다. 게다가 방을 뒤진 흔적도 전혀 없었다.
또 지난달 24일 발생한 신사동 사건 때도 장롱 안에 현금 2백80만원과 다이아몬드 등 귀금속 20여점이 그대로 있었다. 여기에 사건 현장이 단독주택의 2층이었고, 힘이 약한 노인들만을 대상으로 범행을 저지른 것도 눈여겨 볼 점. 때문에 일선 수사관들 사이에서도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에 차이를 보이고 있다.
강남경찰서의 또다른 관계자는 “범행의 수법이나 대상 등에 공통점이 많다”며 “부유층에 대한 증오심을 가진 동일범의 소행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고 귀띔했다. 문제는 아직까지 경찰이 뚜렷한 단서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강남경찰서는 최근 사건 해결에 결정적 제보를 한 사람에게 각각 1천만원의 현상금을 내거는 조치를 취했다. 경찰이 수사중인 사건에 현상금을 내거는 것은 이례적이라는 점에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최근 벌어진 일련의 사건에 경찰이 어느정도의 부담을 느끼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인 셈.
경찰은 이 같은 살인사건이 잇따르자 강남구 역삼동에 신축될 3층짜리 통합지구대에 방범용 CCTV 중앙관제실을 설치하는 문제도 검토중이다. 일선 경찰서에서 이처럼 대규모 CCTV 중앙관제실을 운영하는 것은 처음이다.
강남경찰서측은 “사건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는 시민들의 제보가 절실한 상황”이라며 “경찰청 예산을 통해 현상금을 확보해놓은 만큼 결정적인 내용을 제보한 사람에게는 1천만원을 지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석 프리랜서 zeus@newsbank21.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