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칭 ‘수도승’ 전씨가 펴낸 책들. 제목들을 보면 그가 어떤 부류의 사람들을 유인하려 했는지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불치병에 걸린 사람, 주식투자나 사업에 실패한 사람들이 이 책의 주 독자였다. | ||
한 가지 눈길을 끄는 것은 전씨의 일부 혐의(7억5천만원가량의 사기) 에 대해서는 무죄가 선고됐다는 점. 1백75명에 이르는 피해자들 가운데 7명이 전씨의 덕을 보았다고 주장해 일부 피해사실을 입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씨는 경찰과 검찰에서도 자신은 사기꾼이 아니라 진짜 도인이라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과연 전씨는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는 진짜 수도승일까, 아니면 끝까지 본색을 감추려 한 고단수의 사기꾼일까.
수사 관계자에 따르면 이번 사건은 1명의 주연과 1명의 조연이 연출한 2인1조 사기극이었다. ‘보성’(가명)이라는 법명을 쓰던 주범 전씨와 ‘수도승 보성’의 홍보맨 역할을 하던 공범 김아무개씨(여·36)가 그 장본인.
무명의 전씨가 수많은 피해자들을 현혹시킬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집필한 다섯 권의 책 덕분이었다. 이 책들에는 전씨의 과장된 능력과 함께 신비한 기운을 갖게 된 동기에서부터 이것이 세상에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설명하는 내용이 그럴듯하게 담겨 있었다.
전씨가 책 속에서 자신의 ‘도’나 ‘기’의 존재를 독자들이 확신하도록 만드는 방식은 간단했다. “휴대전화기의 전파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지만 전파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인정한다. ‘도’라는 것도 마찬가지다”라는 논리였다. 이 책을 읽은 상당수 사람들이 전씨의 신비한 능력에 대해 ‘환상’을 갖게 됐다는 것이 수사를 담당했던 경찰의 전언이다.
<암 없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 <내가 운명을 바꾼다>, <대운을 잡으시오>…. 전씨가 법명으로 쓴 ‘저서’의 제목들을 보면 그가 어떤 부류의 사람들을 유인하려 했는지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암 등 불치병에 걸린 사람, 주식투자로 큰 손해를 본 사람, 사업이 잘 되지 않는 사람들이 이 책들의 주 독자였다.
전씨는 신문에 ‘주문판매용’ 책 광고를 내보내 ‘손님’들을 끌어모았다. 책을 주문한 사람들 가운데 전씨에 대한 관심이 커진 이들이 하나둘씩 전씨 책을 펴낸 출판사에 연락을 취해왔다. 서울 강남에 있던 이 출판사의 대표가 바로 전씨의 공범인 김씨였다.
김씨는 전화로 문의하는 독자들을 전씨가 거주하는 대전으로 내려보냈다. 당시 전씨는 대전의 한 가건물을 개조해 암자로 사용하고 있었다.
도통한 수도승으로 행세하는 전씨를 만나는 데엔 꽤 돈이 들었다. 전씨는 자신에게 찾아온 사람들로부터 ‘상담료’조로 50만원씩을 받았다. 이런 방식으로 고액의 상담을 받은 사람들만 해도 1백75명, 이들로부터 거둬들인 상담료도 8천7백50만원에 이른다.
전씨는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대뜸 “당신 얼굴에는 친정·외가 쪽으로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떠도는 원귀가 5백∼6백개나 된다”며 불안심리를 자극했다. 여기에 ‘오링테스트’ 같은 간단한 체질 검사법을 이용해 피해자들에게 자신의 ‘신통력’을 과시했다. 절박한 심정에 대전까지 내려간 사람들 중 대다수는 전씨의 말을 믿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전씨는 이들에게 “‘천도제’를 지내 운명을 바꿔야 한다”며 거액의 돈을 요구했다. 떠나지 못한 주변의 영혼들이 편안히 제자리를 찾아가도록 제를 지내야 운이 뚫린다는 것이었다. 어떻게든 난국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던 피해자들은 천도제를 위해 수백만원 혹은 수천만원의 돈을 전씨에게 갖다주었다. 그러나 전씨가 실제 천도제를 지냈는지 피해자들은 확인할 길이 없었다. 전씨가 말하는 천도제는 전씨 홀로 깊은 산속에 들어가 제사를 지내는 것인데 피해자들은 이를 직접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가장 많은 피해를 당한 사람은 아들이 ‘틱장애’(스트레스로 말을 더듬거나 눈을 깜박이는 증상)와 ‘성장멈춤증’을 앓고 있는 주부 이아무개씨였다. 당시 이씨는 그간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용하다는 민간요법은 다 써보았으나 아들의 병세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아 애태우던 상태였다.
이씨가 소문을 듣고 전씨를 찾아간 것은 지난 2002년 12월. 전씨는 이씨에게 아들의 병을 낫게 해주겠다며 천도제 비용으로 4천만원을 받았다. 그러나 한 번 미끼를 던진 전씨는 이씨를 좀처럼 놓치지 않았다. 이듬해 3월 전씨는 이씨의 아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 척하면서 이씨에게 돈을 빌려줄 것을 요구했다. 4개월 후 틀림없이 돌려줄 테니 4억원을 빌려달라는 것이었다. 아들에게 누가 될까 염려했던 이씨는 결국 4억원을 빌려주었다가 뒤늦게 사기당한 것을 알고 전씨를 경찰에 신고했다.
절박한 사연이 있는 피해자들을 이용해 돈을 뜯어낸 사례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전씨는 지난해 7월 주식투자가 잘 되도록 해달라고 찾아온 이아무개씨를 상대로도 사기극을 벌였다. 당시 전씨는 “증권에 기가 있으니 발복기도를 한 후에 투자를 하면 대박이 날 것이다. 그 전까지는 이미 발복이 돼 있는 김씨(공범)의 통장에 돈을 넣어두라. 그러면 대신 투자를 해주겠다. 나중에 당신의 계좌가 발복이 되면 그때 돌려주겠다”면서 이씨로부터 3억원을 받아냈다.
경찰에 따르면 전씨에겐 사기 및 사문서 위조 등 모두 11건의 전과기록이 있었다. 전씨는 특히 화술이 뛰어나 누구든 그의 말을 한번 들으면 쉽게 현혹될 수밖에 없었다는 게 수사 담당자의 전언. 이번 사건의 피해자들 가운데 교사와 교수, 경찰관과 지방의 국장급 공무원까지 있었다. 심지어 증권사 직원이 주식동향에 대해 상담을 받기도 했다고 하니 전씨의 사기 ‘내공’이 만만치 않았던 셈이다.
그러나 경찰과 검찰 조사과정에서 전씨는 자신의 혐의를 극구 부인했다. 경찰 조사를 받던 중 취재를 나온 방송 카메라기자 앞에서도 자신의 책을 들이밀며 “나는 사기꾼이 아니다. 경찰이 ‘도’를 이해하지 못한다”면서 형사들을 원망했다고 한다. 자신의 말대로 진짜 도통한 사람이었다면 과연 전씨는 철창에 갇힐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