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래픽=장영석 기자 zzang@ilyo.co.kr | ||
특히 경찰 관계자를 놀라게 한 것은 이씨의 끔찍한 범행 방법이었다. 그녀는 야구방망이를 이용, 손씨의 두개골을 절반이나 함몰시킬 정도로 잔인하게 내리쳤던 것으로 밝혀졌다. 더군다나 그녀는 경찰 조사에서 “내가 한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수사 결과 밝혀진 이 끔찍한 살인극의 이면에는 한 조선족 여인의 한많은 사연이 숨겨져 있었다.
변사체 발견 당시 숨진 손씨는 알몸인 상태로 이불에 덮여져 있었다. 텔레비전과 에어컨이 켜져 있었고, 두개골이 함몰된 점으로 봐서 경찰은 면식범에 의한 원한 살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살해당한 후 보름이나 지난 뒤 발견돼 지문이나 머리카락 등 범인의 흔적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러던 중 경찰은 손씨의 원룸에서 결정적인 증거가 될 만한 비디오테이프를 발견했다. 비디오테이프에는 숨진 손씨가 한 30대 여성과 억지로 성관계를 갖는 모습이 담겨있었다. 경찰은 테이프 속의 여인을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이 여성의 신변을 확보하는 데 수사력을 모았다. 테이프 속의 여인이 바로 내연녀인 이씨였다.
경찰 조사 결과 이씨는 손씨에게 폭탄주를 먹여 잠들게 한 후 미리 준비한 야구방망이로 손씨의 머리를 네 차례 힘껏 내리친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이씨는 “야구방망이에 나의 모든 한(恨)을 실어 내리쳤다”며 “그가 죽은 지금도 절대 그를 용서할 수 없다”고 울분을 토했다고 경찰은 전했다.
이씨가 전하는 손씨와의 끔찍한 인연은 지난 2001년부터 비롯되었다. 문제는 인터넷 채팅이었다.
조선족인 이씨는 중국의 명문 텐진대(天津大) 사범대를 졸업했다. 졸업 후 2년간 중국에서 유치원 교사로 일한 적이 있는 이씨는 지난 96년 6월 국제결혼회사의 소개로 남편 박아무개씨(38)와 결혼해 한국으로 왔다.
중국에서 양부모 슬하에 자란 이씨는 어려서부터 가난과 폭력에 시달려 불우한 시절을 보냈다. 남달리 배움에 대한 욕망과 총명함이 있었던 이씨는 어렵사리 대학을 졸업하고도 사정이 나아지지 않자 코리안드림을 꿈꾸며 행복하고 안정된 삶을 찾아 한국행을 선택했다.
그러나 이씨의 기대와 달리 한국에서의 생활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조선족이라는 이유로 주위의 무시와 냉대에 시달려야했다는 것. 경찰은 “이씨는 시집온 날부터 조선족이라는 이유로 시댁에서 무시 받았다. 그리고 이씨의 기대와 달리 시댁도 궁핍한 형편이어서 그에 대한 실망도 컸다. 하지만 이씨는 독학으로 인터넷과 통신장비 기술을 익혀 국내의 한 통신회사에 취직해 부지런히 돈을 모았다”고 전했다.
직장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이씨는 연봉 2천만원 이상을 받으며 나름대로 안정적인 위치를 가졌다. 특히 남편과의 사이에 태어난 두 딸은 이씨에게 가장 큰 선물이었다. 하지만 조선족 여인이라는 국내의 편견과 냉대, 그리고 무시의 눈길은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았다고 한다. 남편 또한 그녀에게 살갑게 다가오기는커녕 점점 거리감이 더해졌다고 한다.
그러던 2001년 이씨는 인터넷 채팅을 통해 손씨를 알게 되었다. 경찰은 “정에 굶주린 이씨는 손씨의 다정다감한 성격과 친절한 매너에 푹 빠졌다. 이씨는 ‘지금껏 나를 그렇게 따뜻하게 대해 준 사람은 한국에서 손씨밖에 없었다’고 말할 정도”라고 전했다.
이씨와 손씨는 곧 내연의 관계로 발전했고 이런 관계는 1년이 넘게 지속됐다. 하지만 이씨가 손씨에게 자신이 조선족이라는 사실을 말하자 손씨의 태도는 갑자기 돌변했다는 것. 이때부터 손씨는 이씨를 성노리개로 삼기 시작했다고 한다.
손씨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씨를 불러내 강제로 성관계를 가지며 심지어는 이씨 몰래 성관계 장면을 찍고 이를 미끼로 남편에게 알리겠다고 협박까지 했다는 것이 이씨의 주장이다. 손씨는 이씨의 남편이 집에 없는 틈을 타 이씨의 집까지 찾아와 그녀의 두 딸이 쳐다보는 가운데서도 이씨와 성관계를 갖는 파렴치한 행각을 벌였다고 한다. 이씨는 저항하고 반발했지만 손씨는 막무가내였다는 것.
실제 살해 현장에서 발견된 두 사람의 성관계가 담긴 비디오테이프에 이런 정황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의 한 관계자는 “이씨는 발가벗겨진 채 고목나무처럼 누워만 있고 손씨는 그런 이씨를 마치 인형을 가지고 놀듯이 다뤘다. 심지어는 화면 중간중간에 이씨의 딸들도 보이는 것으로 봐서 그는 어린 이씨 딸들 앞에서 태연하게 그런 짓을 저질렀던 것으로 보인다. 손씨가 이씨에게 ‘너는 무조건 내가 하라는 대로 해야한다’고 윽박지르는 장면도 나온다. 무표정하게 손씨의 억압에 체념한 듯 당하고 있는 이씨가 가엾어 보였다”고 혀를 찼다.
손씨의 학대와 폭력이 계속되자 이씨는 손씨에게 그만 만날 것을 애원했다고 한다. 그럴수록 손씨는 더욱 집요하게 이씨를 괴롭혔다는 것. 이씨는 “내가 그를 안 만나려고 피하면 심지어 그는 내 딸들을 자신의 원룸으로 데려가 버리는가 하면, 억지로 내게 돈을 빌려주기까지 하면서 관계를 지속하려했다. 손씨 몰래 이사까지 갔지만 용케도 이사 간 집을 알아내 괴롭혔다”고 토로한 것으로 전해졌다.
실제 이씨는 지난 5월 대구로 이사를 간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손씨는 다시 이씨를 찾아내 화성의 자신의 원룸으로 불렀다는 것. 두 딸과 함께 손씨에게 찾아간 이씨는 자신을 놓아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지만 손씨는 오히려 비디오테이프를 인터넷에 공개하겠다고 협박했다고 한다. 그리고 손씨는 5월23일과 24일 이틀 동안 이씨와 어린 딸들을 감금한 채 또다시 자신의 성욕을 채웠고, 결국 이씨는 살인을 결심하게 됐다고 한다.
5월25일 야구방망이를 준비한 이씨는 손씨에게 술을 잔뜩 권했고, 오후 10시 손씨가 술에 취해 곯아떨어지고 아이들도 잠들자 이씨는 야구방망이로 범행을 저지르고 말았다.
이번 사건을 담당한 화성 경찰서의 한 관계자는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어서 이씨의 진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지만, 비디오테이프 등 여러 정황상 그녀의 진술에 상당한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고 밝혔다. 이혼한 채 혼자 살았던 손씨는 가족들에게도 모두 잊혀진 존재였던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 관계자는 “손씨 가족과 동생들이 있었지만 누구도 찾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이씨의 사정이 비록 딱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같은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지 못하고 살인까지 한 이상 죄값은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결국 이씨는 자신이 꿈꿔왔던 8년간의 코리안드림이 산산이 깨져버린 채 분신과도 같은 두 딸을 남겨두고 철창 안으로 사라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