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자와 만나 사건 전후를 설명하고 있는 A씨(뒷모습). 그는 자신 때문에 피해를 입은 B씨와 그 가족에게 너무 미안하다고 심정을 밝혔다. | ||
이 사건은 혼인신고 사실을 뒤늦게 안 공익근무요원 A씨의 아버지(51)가 A씨(24)와 A씨의 여자친구 B씨(23)를 상대로 지난해 8월 혼인무효소송을 내면서 시작됐다. A씨와 B씨도 재판 내내 혼인이 취소되길 원해 원고와 피고의 주장이 일치하는 보기 드문 송사가 돼버렸다. 그러나 법원은 “혼인서류에도 A씨와 B씨가 자필로 서명해 본인들의 의사에 따라 이루어진 혼인신고로 판단된다. 이들의 혼인을 무효로 볼 만한 증거는 없다”고 말했다.
어찌보면 ‘철없는 아이들’의 장난 같은 이 사건의 전말은 무엇일까. 당사자인 공익요원 A씨(24)를 만나 사연을 들어보았다.
A씨는 지난해 2월부터 서울시 산하 사업소의 공익근무요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A씨가 배정받은 근무지는 화물차 검문소.
그는 왜 근무지를 옮기길 원했을까. A씨는 “일이 힘든 데다 하루 3교대로 이루어져 적응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처음 배정받을 당시 불량스런 공익요원이 많아 군기도 세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다”고 털어놨다. A씨에 따르면 평소 생각과 달리 공익근무가 힘들어 고민이 많았다는 것. 그래서 A씨는 근무지를 옮기기로 결심하고 친한 선배에게 조언을 구했다고 한다.
A씨는 “선배 말을 듣고 가족이 모두 주소를 옮겨야 근무지를 바꿀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나 때문에 온 가족이 이사갈 수는 없어 생각해 낸 것이 가짜 혼인신고였다”고 설명했다. 즉 혼인을 해 분가를 하면 근무지를 옮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에 A씨는 평소 알고 지내던 여자들에게 사정을 얘기하고 자신과 혼인신고를 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A씨의 제안을 받은 여자들은 거의 모두 거절했다. 그 중 4년 전부터 알고 지내던 B씨(23)에게 간절히 부탁해 지난해 4월 혼인신고를 했다.
A씨는 “B씨도 계속 거절했지만 내가 반강제적으로 구청에 데리고 가서 혼인신고를 했다”며 “B씨와 B씨의 가족들에게 미안할 뿐이다”고 말했다. 그러나 A씨는 B씨와는 애인사이가 아니라 그냥 친한 오빠, 동생 사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혼인신고를 한 후에도 A씨와 B씨는 동거 한 번 한 적이 없다고 한다. 한 가지 의아스러운 부분은 A씨가 그후 주소지를 옮기지 않았다는 점. 재판부는 A씨가 근무처를 옮기기 위해 혼인신고를 했다고 하지만 정작 혼인신고 후 주소지를 변경하지 않은 점을 들어 A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대해 A씨는 “주소지를 옮기려고 했는데 그때쯤 공익근무요원 중 친한 사람들도 생기고 근무지에 적응도 하게 돼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고 말했다. 자신의 주장대로라면 A씨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해결될 문제를 전전긍긍하다가 법적으로 유부남이 돼버린 셈이다.
A씨는 “그때는 당장 너무 힘들어 뒷일은 생각하지 못하고 일을 저지른 것이다. 부모님은 물론이고 B씨와 B씨의 부모님께서도 크게 화를 내셨다”고 전했다.
이번 판결이 있은 후 A씨의 아버지는 곧바로 항소를 제기했다. 만약 항소심에서 지고 대법원에서도 기각당하면 A씨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남아 있다. B씨와의 혼인을 받아들이고 정식으로 결혼을 하는 것과 법적으로 이혼절차를 밟는 것.
A씨는 “대법원에서도 기각된다면 이혼절차를 밟을 수밖에 없다. B씨 또한 그걸 원하고 있다. 실제로 나와 결혼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현재 B씨는 해외유학을 떠났고 A씨는 집에서 쫓겨 나와 있는 상태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길게 한숨을 내쉬던 A씨는 ‘가장’(家長)의 무거운 책임을 느끼는 듯 힘든 모습이었다. 한순간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벌인 ‘황당 혼인신고’가 평생 그의 멍에가 돼 따라다니게 됐기 때문이다.
[훈]